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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6월 4일 21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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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 패션업계에선 이런 말이 나온다. 갸루란 '소녀'를 뜻하는 영어 '걸(Girl)'을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으로 원래 밝게 염색한 머리, 아이라인을 강조한 짙은 눈 화장 등을 즐기는 젊은 일본 여성을 지칭하던 속어다. 그러나 최근엔 독특한 스타일과 함께 자신을 꾸미는데 적극적이며 비용도 아끼지 않는 여성을 뜻하는 의미로 통한다.
금융위기로 일본도 내수 침체 등 불황이 극심한 가운데 갸루를 대상으로 한 '갸루 시장'은 '나홀로 호황'을 누리고 있다. '갸루 산업혁명'이란 말도 이들을 주제로 한 산업이 세분화되고 규모가 커지면서 등장했다. '일본 경기회복의 열쇠는 갸루가 쥐고 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시사주간지 아에라 최신호는 일본의 의류, 화장품, 액세서리 등 패션업계를 비롯해 유통, 출판업계까지 업계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갸루 비즈니스의 인기 비결을 분석했다.
●명품업체, 대기업도 눈독 들이는 갸루 시장
올 3월 갸루 스타일을 주제로 열린 '도쿄 걸즈 컬렉션 2009'에는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세계적 명품업체 '질 스튜어트'가 참가해 신제품을 선보였다. 도요타 유니클로 등 대기업과 일본 외무성, 환경성 등 정부기관이 협찬해 대규모 패션 행사로 치러졌다. 같은 달 고베(神戶)에서 갸루 패션을 테마로 열린 '고베 컬렉션 2009'엔 명품업체 펜디 이마뉴엘 웅가로 등이 참가했다.
질 스튜어트 일본 홍보담당자인 나카야마 마리코(中山眞梨子) 씨는 "갸루는 유행에 민감하고 다양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소비자"라며 "열광적인 마켓인 도쿄 걸즈 컬렉션에 참가해 (질 스튜어트로서도) 큰 자극이 됐다"고 밝혔다.
아에라는 갸루 패션이 그동안 업계에선 크게 주목받지 못한 '마이너 시장'이었다는 점에서 명품업체와 대기업 진출을 이례적인 것으로 평가했다. 주로 청소년, 20대 여성이 소비하는 중저가 아이템이어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시장이었지만 이제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패션업계에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는 설명이다.
업계에선 갸루를 내세운 일본의 각종 컬렉션이 파리, 밀라노, 뉴욕 컬렉션 등 세계 주요 패션행사와 견줄만한 규모로 성장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실제로 이 같은 스타일은 한국 중국 등 아시아를 비롯해 유럽 미국 등 세계 각국 젊은 여성에게 퍼져나가고 있다.
●"불황은 없다"…유통, 출판업계도 갸루 열풍
도쿄의 대표적 쇼핑몰인 '시부야 109'는 갸루의 성지(聖地)로 불린다. 이 쇼핑몰은 원래 의류 가구 전자기기 등 모든 종류의 상품을 판매하는 일반 백화점과 같은 형태였다. 그러나 90년대 후반부터 갸루를 주요 타깃으로 삼은 중저가 의류, 액세서리 매장 120곳이 입점하며 변신했다.
'시부야 109'도 90년대 초반부터 '잃어버린 10년'의 여파로 매출이 급감하며 경영난에 시달렸다. 그러나 갸루 전문 쇼핑몰을 표방한 뒤 95년부터 지난해까지 매출이 줄곧 증가했다. 지난해 매출액은 286억 엔으로 13년 전(141억 엔)에 비해 2배 이상 늘었다.
유통업계 등 일본 각 산업계는 갈수록 심각해지는 불황과 내수 침체 속에서 '시부야 109'를 성공 모델로 삼기 위해 주목한다. 도쿄대에선 지난달 이 쇼핑몰의 성공 비결을 분석하는 강의도 마련됐다. '시부야 109'의 매출 증가는 판매자와 소비자가 취향과 감성을 공유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손님이 좋아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갸루를 매장 점원으로 고용한다는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갸루 마켓의 성공 원칙을 다섯 가지로 꼽는다. △중저가의 서민적 가격 △섹시한 디자인 △소비자 시각을 고려하고 유행에 맞춘 '믹싱(mixing) 감각' △디테일주의(헤어스타일부터 의상, 손톱까지 몸 전체를 만족시킨다는 의미) △아무로 나미에 등 일본 톱스타의 패션 스타일을 적절히 고려한 '현실감 있는 환타지' 등이다.
갸루는 출판업계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갸루 문화를 소개하는 전문잡지인 '팝틴'은 매달 발행하는 30만부가 거의 모두 팔린다고 아에라는 전했다. 지난해엔 잡지 구매력이 높은 15~19세 여성이 가장 많이 보는 잡지로 조사된 바 있다. 일본에서 잡지 폐간이 잇따르며 출판업계가 고전하는 가운데 '팝틴'을 비롯한 갸루 잡지만큼은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
아에라는 갸루가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해 이 같은 문화를 확산시키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전했다. 청소년 시절 갸루 패션을 즐기며 소비자 수준에 머물던 이들은 이제 의류 액세서리 등 자신의 브랜드를 직접 운영하거나 디자이너, 잡지사 기자 등 전문직으로 나서고 있다는 설명이다.
남원상 기자 surre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