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제7장 亞太전쟁과 국공 내전(上)

  • 입력 2008년 1월 29일 16시 25분


아베 센지씨(왼쪽 사진)와 미국 원로 병사들의 교류가 하와이 현지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아베 센지씨(왼쪽 사진)와 미국 원로 병사들의 교류가 하와이 현지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도조 히데키(東条英機) 육군성 장관
도조 히데키(東条英機) 육군성 장관
도고 시게노리(東郷 茂徳) 외상
도고 시게노리(東郷 茂徳) 외상
대미 개전에 이르기까지 18만 8천 명

“전사자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라는 정신적인 구속

《 일본군이 싸운 지역을 보면, 새삼스런 말 같지만 그 광대함에 놀란다. 확실히 아시아 태평양전쟁은 미증유의 싸움이었다. 이번 (상)에서는 왜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을 단행했는지를 살펴보고, (하)에서는 일본의 패배에 이어서 중국 대륙에서 일어난 국공 내전을 살펴보기로 한다. 》

“걱정스러운 것은 테러와의 싸움과 (지구 온난화의) 탄소 가스입니다.”노인은 자신에게 타이르듯이 말했다.

한 세기 가까운 세월을 살아오고도, 지금도 지구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다. 나는 그의 말을 새겨들으며, “네”라고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해군 중령이었던 기야마 마사요시(木山正義) 씨(98)이다.

대(対) 미 전쟁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던 과정을 그리려고 여러 가지 자료를 읽고 있는 동안, 개전을 결정하고 이끌어 가던 측의 ‘육성’을 꼭 들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개전으로부터 66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버려서, 당시의 중요 인물들은 벌써 세상을 떠났고, ‘국책’이라고 불린 국가의 중요 정책을 기안한 육해군의 참모 장교들도 이미 잠든 후였다. 대본영 육군부에서 당시 가장 젊은 참모 장교였던 세지마 류조(瀬島龍三) 씨가 2007년 9월에 9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무리인 줄 알면서도 일단은 해 보는 것이 신문기자의 일이다. 각 방면으로 수소문을 하던 중, 친절한 분이 기야마(木山) 씨를 소개해 주었다.

구마모토현(熊本県) 출신의 기야마씨는, 해군 기관 학교를 나온 엘리트 장교였다. 개전 당시에는 군 중앙부 소속은 아니었지만, 1944년 1월부터 해군성 군수국원(軍需局員)으로서 연료 정책의 책임자가 되었다. 전시 군 중앙부의 분위기를 직접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전후에는 해외에서 귀국한 귀환자들의 일자리를 위해 연료 회사 등을 세웠다.

“개전할 무렵, 미국과 전쟁을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습니까?”가장 궁금했던 질문하자 즉시 대답을 주었다.

“나는 미국과 전쟁을 하는 것은 턱없이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미국과 전쟁을 해도 이길 가망은 없었다. 군인들의 조금은 ‘고만 증후군’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턱없이 어리석은 행동’ 해군에서 그 당시 이렇게 느끼고 있던 사람들은 기야마씨 뿐만이 아니라, 수뇌 진영에도 많이 있었다. 미일 개전의 결정 과정을 연구하고 있는 모리야마 아쓰시(森山優) 시즈오카현립대(静岡県立大) 강사는 “당시, 일본에는 나라의 운명을 걸어가면서까지 미국과 싸워야 할 이해관계는 없었다. 미국의 여론도 압도적으로 중국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을 위해 자청해서 피를 흘렸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결과로 보면 매우 기묘한 전쟁이었다”라고 한다.

●기묘한 전쟁 / 석유 수출입 금지가 계기로

그러면, 기묘한 전쟁이 왜 일어났는가. 이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1937년 7월, 중일 전쟁이 발발한 1937년 7월 이후의 경과를 ‘지난 호의 줄거리’풍으로 대충 훑어보기로 한다.

일본은 수도 난징(南京)을 함락시키면 중국은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 정부는 벽지의 충칭(重慶)을 임시 수도로 정하고 항전을 계속했으며, 이를 영국과 미국이 지원 → 중일 전쟁은 수렁 상태로 빠져 들어, 일본군은 대 미영 개전까지 실로 18만 8천여 명이라는 전사자를 냈다. 한편, 히틀러가 인솔하는 독일이 유럽에서 전쟁을 일으켜서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항복 →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의 삼국 군사 동맹을 맺어, 미국과 영국에 압력을 가하려 함 →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어, 미국의 강경 자세를 부르게 되었고, 당시의 일본은 석유 수입의 대부분을 미국에 의지하고 있었으나, 1941년 8월 미국은 전면적인 대일 수출 금지를 결정.

일본은 미국의 석유 수출입 금지에 의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국면에 처하게 되어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됐다. 선택지는 크게 말하자면, 둘 중의 하나였다.

석유 등 중요 물자를 얻기 위해, 네덜란드령이었던 인도네시아와 영국령의 말레이시아 등을 무력으로 제압한 것, 즉 장제스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라도, 미국과 영국과의 전면 전쟁을 단행하는 것이다.

아니면, 중국으로부터의 철병 등의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

쇼와(昭和) 천황도, 당시의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수상도 전쟁은 피하고 싶었다. 미국은 지금 정도의 군사 초강대국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자동차의 생산 대수만을 비교하더라도 일본의 100배나 되는 압도적인 공업 분야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육군이 중국으로부터의 철병이라는 요구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 주장을 잘 말해주는 것이, 10월 14일 내각 회의의 도조 히데키(東条英機) 육군성 장관의 발언이다.

“철병 문제는 심장 그 자체다. 미국의 주장에 그대로 복종한다면, 시나 사변(支那事変)의 성과는 괴멸하고 만다. 만주국도 위태로워진다. 나아가, 조선 통치도 불안정해진다. 시나 사변(支那事変)은 수십만 명의 전사자와 수배가 넘는 유가족, 그리고 수십만의 부상자, 수백만의 군대와 1억 국민들이 전장과 내지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군대를 주둔 시키는 것은 심장이다. (생략)양보, 양보하고 또 양보를 해서, 거기에 이러한 기본을 이루는 심장까지 양보할 필요가 있습니까? 여기까지 양보했는데, 이런 걸 두고 외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건 항복입니다.”

육군은 식민지 통치에 미칠 영향은 물론, 호락호락 군사를 철병하는 것은 메이지 이래의 육군 주도의 대륙 정책을 부정하는 것이며, 위신 실추로 이어지게 된다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덧붙여, 전쟁 전의 일본은 “전사자들에게 미안해서라도 ××은 할 수 없다”라는 레토릭이 넓게 횡행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러일 전쟁 후 원로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가 정부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관둥저우(関東州)의 반환 문제에 관해, “20억의 자재와 20여 만의 사상을 치르고 획득한 전리품을 반환할 수는 없다”라는 취지를 밝혔다. 이와 같은 “전사자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라는 심리적인 구속이자 주장을 정당화시키는 레토릭이 전쟁을 계속하게 만들어, 본토 결전 직전에까지 이르게 한 하나의 요인이 되지는 않았을까.

그런데 정부와 군부 안에서는, 미국과의 전쟁을 하는 당사자들은 넓은 태평양에서 함대끼리 서로 싸우게 될 해군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해군이 “절대로 전쟁은 할 수 없다”라는 자세를 고수했다면, 대미 전쟁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상의 적은 미국”이라는 이유로, 전쟁 준비를 위한 예산을 받아 온 해군이 “질것 같아 할 수 없다”라고 인정하는 것은, 스스로의 존재 의의를 부정하는 것과도 같았다. 해군에게도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사정에 어두운 채로 / 새로운 해군 장관은 개전을 결의

고노에 수상은 도조(東条)의 ‘군대의 주둔은 심장’이라는 발언이 있은 2일 후에 사직한다. 쇼와 천황은 후임으로 도조를 선택했다. 도조라면 육군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며, 한번 더 국책을 백지로 돌려 재검토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군부의 톱인 육군, 해군 장관, 참모총장, 군령부 총장 4명 가운데, 신 내각에서 교체 된 것은 해군 장관뿐이었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발상의 전환은 어렵다. 게다가, 도조는 해군이 추천한 피전파(避戦派)의 해군 장관 후보를 거부했다. 갑작스럽게 해군 장관이 된 시마다 시게타로(嶋田 繁太郎)는 중앙의 사정에는 어두운 인물이었다.

시마다(嶋田)는 10월 30일 오후, 피전파의 사와모토 요리오(沢本 頼雄) 해군 차관 등을 불러서 개전을 결의했음을 알리고 이렇게 말했다.

“아직 중앙의 움직임도 잘 모르지만, 며칠 동안의 분위기를 종합 판단하면 이번 대세는 용이하게 만회할 수 없다.”

사와모토(沢本)의 일기에 따르면, 사와모토는 이후 다시 시마다와 만나서 결의를 바꾸려는 시도를 했다.

사와모토 : 육군에게(미일) 교섭 조건 완화에 관한 재고를 요구해야 합니다.

시마다 : 그런 일이 하면, 20만 명의 죽은 육군 영령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게 된다. 시나 사변의 성과를 물거품으로 돌리는 생각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

사와모토 : 그것을 바꿀지 않을 지가 문제입니다. (생각을)바꿔서는 안 된다고 하는 데에 육군의 완고함이 있습니다. 이를 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와모토의 마지막 끈질김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들 수 없다”라는 레토릭 앞에는 통하지를 않았다.

해군도 개전을 결의했지만, 도고 시게노리(東郷 茂徳) 외상은 더욱 더 즉각적인 개전에 저항했다. 여기에서는 마지막 장면에서 도고(東郷)가 짜낸 비책을 소개한다.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린 11월 1일의 대본영 정부 연락 회의에서는 다음날 미명까지 17시간에 걸친 논의 끝에, 월말까지 외교 결착을 보지 못하면, 12 월 초에 개전하기로 결정을 했다.

문제는 미국과의 교섭을 하는데에 있어 어디까지 양보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이미 정부와 군부의 조정으로 일본 측의 최종안(‘갑 안’)은 정해져 있었지만, 도고 외상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새로운 안(‘을 안’)을 제시했다. 일본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남부 프랑스령 인도지나)에 진주하여, 미국의 석유 수출입 금지를 불러 일으켰지만, 거기에서 북부 쪽으로 철수하는 대신에, 미국은 일정량의 석유 수출을 인정한다는 것을 안목으로 한 내용이었다.

이는 <갑 안>으로는 결정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도고가 중국으로부터의 철병 문제에 대해서는 건드리지 않은 채 개전을 피하기 위해 꺼낸 ‘비장의 카드’였다.

최근 호소야 지히로(細谷 千博) 히토쓰바시대(一橋大) 명예 교수와 사토 모토에이(佐藤 元英) 주오대(中央大) 교수가 미일 교섭에 관계되는 문서를 찾아내어, <을 안>을 둘러싼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문서에는 “일미 교섭 경위(하권)”라고 제목이 붙어 있고, 개전 다음 해에 가세 도시카즈(加瀬 俊一) 미국국 1 과장이 정리했다.

●비장의 카드의 양보 내용 / 외교 전보로부터 삭제

<을 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특별한 고려에 근거하여, <을 안>으로부터 “남부 프랑스령 인도지나 주둔 중의 일본군은 북부에 이주할 뜻이 있다”라는 구절을 제외한 것을, <을 안>으로 해서 전보를 쳤다.”

다시 말해, <을 안>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양보에 관한 내용에 관해서는 워싱턴의 일본 대사관에 보낸 외교 전보에서는 일부러 넣지를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 내용을 포함한 것은, 최종 교섭을 위해서 서둘러 파견한 구로스 사부로(来栖 三郎) 대사가 가져가도록 했다는 새로운 사실을 이 문서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도고는 외교 전보의 암호가 미국 측에 해독될 위험성을 감안해서 “비장의 카드”의 내용을 삭제했을 것이다. 암호 해독으로 미국 측이 사전에 눈치 채 버리면 “비장의 카드”의 효과는 약해진다. 아울러, 일본도 미국의 외교 전보를 감청하여 암호를 해독하고 있었다.

미국 측은 <을 안>이 11월 20일에 제시된 후 그 대안을 정리했다. 일본이 북부 프랑스령 인도지나의 병력을 2만 5천명 이하로 하면, 일본에 민간 주유용 석유를 수출한다는, 3개월 동안만 유효한 잠정 협정 안이었다. 미국으로서는 전쟁 준비에 시간을 더 벌고 싶었기 때문이다.

헐 국무장관은 25일에는 잠정 협정안을 일본 측에 제시할 생각이었지만, 다음날인 26 일 저녁에 발표한 것은, 프랑스령 인도지나와 중국으로부터의 일본의 전면 철병을 요구하는 등의 강경한 기초 협정 안(이른바 “헐 노트”)이었다. 왜 하룻밤에 사이에 미국 측의 생각이 바뀌었는지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만약, 이 잠정 협정 안이 제시되었다면 12월의 개전은 없었을 것이고, 전쟁 그 자체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미일 개전을 반세기 이상 연구해 온 호소야(細谷) 씨는 이렇게 말한다.

“개전이 3개월 늦어졌다면, 일본이 기대하던 독일의 전황은 바뀌어, 미국의 군비는 정비되었겠지요. 일본으로서도 개전을 결정하는 것은 아주 어려워졌을 겁니다. 나는 전쟁이 가져온 참화, 특히 인적 희생을 낳은 것을 생각하면,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한 와신상담의 선택도 어쩔 수 없었다고 봅니다.”

사토 가즈오(佐藤和雄)

● ‘진주만 화해’를 다음 세대에게

진주만 공격이 있었던 12월 7일, 하와이에서는 예년과 다름없이 올해도 추도식이 열렸다. 폭격기 중대장으로 진주만 공격에 참가해, 최근 수십년 간 계속 식전에 출석했던 아베 센지(阿部 善次) 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올 4월에 90세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아베(阿部) 씨는 미국과 일본의 전사자들을 추도하기 위해서, 나팔병이었던 해병 대원 리처드 피스크 씨에게 부탁을 해, 매월 2송이의 장미를 진주만과 태평양 국립 기념 묘지에 헌화하고 있었다. 피스크 씨는 진주만에서 공격을 받은 측이었지만, 군인들의 화해를 호소하는 아베 씨에게 공감하여, 헌화와 함께 진혼의 나팔을 불었다. 이 이야기는 하와이에서는 유명한 얘기로, 그림책으로도 만들어 졌다. 피스크 씨도 3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올해 추도식에는 아베씨를 대신에 딸, 신 나오미(進 直美) 씨(63)와 남편 교지(享治) 씨(65)의 모습이 보였다. 교지씨는 “생전에 아버지는 전쟁이 일어난 것은 서로가 상대를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고 말하며, 고인의 뜻을 이어 체력이 계속 되는 한 추도식에 참가하겠다고 했다.

아시아 태평양전쟁

1941 년 12월 8일부터 45년 8월 15일까지. 일본 대 미국, 영국, 중국 등의 연합국과의 전쟁이다. 국제적으로 보면 제2차 세계대전의 일환이며, 일본의 입장에서는1937년부터 시작된 중국으로의 침략 전쟁의 결착과도 얽힌 전쟁이었다.

일본 시간으로 12월 8일(하와이에서는 7일 아침), 하와이 진주만 공격이 전쟁의 시작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1시간 정도 더 빨랐던 영국령 말레이 반도의 코타발 상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전쟁의 목적은 ‘자급자족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 영국과 네덜란드의 식민지를 무력으로 제압하여 석유 등의 여러 가지 자원을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영국령 등을 공격하면 미국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 태평양 측의 거점을 공격하였다.

전쟁은 1945년 8월의 히로시마(広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폭 투하와 소련의 참전으로, 일본이 연합국 측의 포츠담 선언에 의한 항복 권고를 받아 들임으로써 종결되었다. 일본 역사상, 최대의 참화를 가져온 것은 물론이고, 아시아 태평양에서도 큰 희생을 치렀다. 군인과 일반 국민들을 포함한 일본의 사망자 수는 약 310만 명으로 추정되지만, 외지에서의 생사 불명자와 원폭을 포함한 공중 폭격으로 사망한 수가 뚜렷하지 않아, 사실상의 피해자는 더 많을 것으로 여겨진다.

전쟁의 이름 전쟁이 시작된 2일 후, 일본 정부는 대본영 정부 연락 회의에서 이번 전쟁을 “대동아(大東亜) 전쟁”으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지금까지 “시나 사변(支那事変)”이라던 중일 전쟁도 포함한다고 밝혔다.

이 명칭은 점령 후, 연합국 군 총사령부(GHQ)의 지령으로 공문서에 사용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후 미국 측이 사용하고 있던 ‘태평양전쟁’이라는 호칭이 점차 정착했다. 이번 “역사는 살아 있다”시리즈에서는 중일 전쟁과의 중복 등을 피하고, 전쟁의 성격을 알기 쉽게 전하기 위해서 ‘아시아•태평양전쟁’이라고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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