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청일전쟁]각국의 교과서를 비교하다

  • 입력 2007년 8월 24일 14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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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강의 중국 침략을 그린 풍자화. 일본의 교과서에 실려 있다.
열강의 중국 침략을 그린 풍자화. 일본의 교과서에 실려 있다.
근대 일본과 중국의 최초 전쟁은 한반도가 무대가 되어 대만의 운명을 크게 바꾸었다. 각국의 중학교용 교과서에서는 이 전쟁을 젊은 세대에게 어떻게 전하고 있을까?

일본, ‘일본 측의 논리’를 설명

도쿄(東京) 서적의 “새로운 사회 역사”에서 ‘청일 전쟁’은 2페이지에 걸쳐 기술되어 있으나, 바로 앞 ‘구미 열강의 침략과 조약 개정’의 항에서, 자세하게 청일 개전에 이르기까지의 국제 정세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열강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식민지화 하는 일련의 과정을 ‘제국주의’라 설명하는 한편, 한반도 정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조선에서는 한일 수교 조약을 맺은 일본과, 조선의 지배권을 주장하는 청이 세력 다툼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중략) 1884년에 일어난 정변 이후, 청나라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일본은 구미 열강의 아시아 침략이 노골화되는 가운데, 조선으로의 진출이 막히면 일본의 앞날도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청나라에 대항하기 위한 군비 증강을 계획하고 실행해 나갔습니다.》

일본의 조선 진출은 구미 열강에 대한 위기감에서 기인한다는 설명이다. 도쿄(東京) 서적의 와타나베 노리오(渡邊理夫) 사회 편집부장은 “일본의 정책에도 여러 가지 가능성은 있었지만, 청일 전쟁부터는 러일 전쟁, 조선 침략으로 이어지는 일직선을 달렸다. 이 과정을 말하기 전에 ‘일본 측의 논리’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한다.

’청일 전쟁’의 항목에서는 개전의 계기가 된 농민 봉기에 5줄을 할애하는 한편, 청일 전쟁에 관한 기술은 “전쟁은 우세한 군사력을 가진 일본이 승리하였고, 1895년 4월, 시모노세키(下關) 조약이 맺어졌습니다”라고 짤막하다. 계속해서, 조약의 내용이나, 열강이 청나라에서 세력 확대 경쟁을 한 것, 일본에서는 삼국 간섭을 받아 러시아에 대한 대항심이 높아졌다고 쓰여 있다.

대만의 식민지화에 대해서는 2줄밖에 쓰지 않았다. 다음과 같다.

《대만을 영유한 일본은 대만 총독부를 설치하고, 주민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여, 식민지 지배를 밀고 나갔습니다. 》

(요시자와 다쓰히코(吉澤龍彦))

중국, 침략 전쟁으로 평가

중국의 인민교육출판사 판에서는, ‘갑오 중일 전쟁’은 ‘침략과 반항’이라는 단원에서 4페이지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 일본의 교과서와 비교해 크게 다른 점은 ‘중국으로의 침략 전쟁’이라 평가하고 있는 점이다. 첫머리 3줄에 이렇게 쓰여 있다.

《1894년에 일본은 조선을 정복하고, 중국을 침략하여 세계의 패권을 잡겠다는 몽상을 실현하기 위해, 조선의 수도 한성으로 출병하여 점령하고, 이어서 중국 침략 전쟁을 발동했다.》

이러한 위치 부여는 중국에서 2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베이징 사범대 판에서도 마찬가지다. “갑오 전쟁은 일본이 중국에 대하여 발동한 최초의 대규모 침략 전쟁이다”, “1894년7월, 일본은 선전 포고도 하지 않고 전부터 미리 계획하고 있었던 대중국 전쟁을 발동했다”라며, 일본 측이 주도면밀하게 준비해 온 전쟁인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두 교과서 모두 청나라 해군 함장인 덩스창(鄧世昌)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탄약이 다 떨어지자, “우리가 희생이 된다 할지라도, 국가의 명성을 높이게 될 것이다”라며 일본 군함에 돌진하여 장렬한 전사를 한 사실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전쟁 묘사가 간결한 일본 교과서와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이는 중국의 학습 지도 요령에 해당하는 ‘역사 과정 표준’에서, 학습 목표로서 ‘덩스창의 주요한 업적을 기술하여, 중국 인민의 외국 침략에 저항하는 민족적 기개와 투쟁 정신을 실감한다’라는 기술에 기인한다.

대만 할양에 대해서는, 대만 사람들이 진주해 온 일본군에 대항하여 무장 투쟁으로 일본군에 타격을 입힌 것을 반 페이지 정도로 기록하며 이렇게 끝맺음을 하고 있다.

《얼마 되지 않아 대만의 전 국토가 상실되었다. 그러나 대만의 여러 민족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며, 조국 복귀를 쟁취하려는 투쟁을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

(사토 가즈오(佐藤和雄))

한국, 항일 농민 운동에 초점

한국은 이 전쟁을 ‘청일 전쟁’이라고 부른다. 세계사를 취급하는 금성 출판사의 “사회2”는 ‘일본의 대륙 침략’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다.

《강화도(江華島) 조약으로, 한반도에 침략의 발을 내디딘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 중국으로부터 요동(랴우둥) 반도와 타이완을 할양받았다.》

세계사 부분에서는 이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국정 국사(자국사) 교과서에 나온다. 청일 전쟁은 1894년에 시작된 동학 농민 운동과 뒤에 이어지는 내정 개혁의 항목에 등장한다. 어디까지나 전쟁이 아니고, 농민 운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농민들은 기세를 올려, 마침내 전주를 점령하였다. 다급해진 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 틈을 이용하여 일본도 우리나라에 군대를 보냈다.》

동학 농민 운동의 기술은 7페이지에 달하며, 일본과 청에 의한 내정 간섭, 농민 생활의 곤궁, 정부의 부패라는 상황 속에서, 봉기한 농민의 전투 상황 등과 운동의 의의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전쟁 자체보다도 전쟁의 계기와, 일본군과 싸운 조선 농민군의 역사를 중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과 청나라가 맺은 강화 조약에 대해서도 취급하지 않았다.

《전주 화약을 맺은 후, 농민군이 해산하자, 정부는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궁궐을 침범하였으며,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 이처럼 일본군의 침략 행위가 노골화 되자, 농민군은 일본군 타도를 내세우며 다시 일어섰다.》

국사 편찬 위원회의 구선희(具仙姫) 사료조사실장은 “수탈만을 당했던 농민들이 목소리를 높여 정부에 항의하고, 개혁을 요구한 운동으로서,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라고 설명한다. 동학 농민군이 후에 일본의 지배에 저항하는 의병 투쟁에 참전하여 ‘항일 투쟁의 전통을 이었다’ (국사 교과서)라는 점도, 중요시하는 하나의 이유다.

(사쿠라이 이즈미(櫻井泉))

대만, 식민지의 공죄(功罪)를 상세하게

대만에서는 “국민 중학•사회”(남일 서국(南一書局))의 중국사 부분 ‘청말 개혁의 좌절’에서, 전쟁에 대해 1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전쟁 국면은 지도로 표시하고, 기술은 20수년 전의 교과서와 비교해 간단히 설명하고 있으며, 패전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갑오 전쟁의 실패는 총포와 군대 장비 수준의 개혁만으로는, 스스로를 강하게 하기에는 모자랐다는 것을 증명했다. 》

한편, 전쟁으로 초래된 대만의 일본 할양은, 중학교 1학년 대만사 부분에서 공부한다. 50년에 이르는 식민지 시대를 16페이지에 걸쳐 다루고 있다. 대만의 지방장관 등이 주도했던 대만 민주국 건국과 선주민의 봉기 등, 일본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하여, 경제 발전과 사회 제도의 정비에서 황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식민지의 공죄(功罪)를 기술하고 있다. 그 중, 할양 당시에 대한 기술은 이러하다.

《대만의 명사와 평민은 탕칭숭(唐景崧)과 치우펑짜(丘逢甲) 등을 옹립하여 “대만 민주국”을 만들고, 외부에 지원을 요청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 “살아서 잡히는 것 보다, 죽어서 의민이 되겠다”대만 각지에서는 항일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교육부(교육성) 국민 교육국의 역사 교육 담당 린추엔루(林純如) 씨는 “교과서 기술이 개방적이고 중립적이 되었다. 일본 시대에 대해서도 ‘일본의 점령’과 ‘일본의 통치’라는 말이 있지만, 최근에는 ‘통치’라는 표현이 증가했다. 국민당 시대에는 일본과 단교도 있어서,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라는 감정적인 기술이었다”라며, 신구의 차이를 설명했다.

(다무라 히로쓰구(田村宏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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