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서영아]"위안부 궤변 듣기도 지쳐" 日지식인의 고백

  • 입력 2007년 4월 25일 02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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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 관헌이 군위안부 강제 동원에 적극 개입했음을 입증하는 도쿄(東京)재판 심문조서 기사가 보도된 23일. 본보 도쿄지사에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건 이는 기사 속 ‘1992년 네덜란드 정부 보관문서’를 처음 입수해 보도한 ‘프리랜서’가 자신이라고 소개했다. 아사히신문 홍보부의 오무라 데쓰오(大村哲夫·58) 씨였다.

잠시 뒤 사무실로 찾아온 그는 가방에서 1992년 9월 2일 날짜가 찍힌 색 바랜 팩스 원본과 자신이 쓴 기사의 복사본을 주섬주섬 끄집어냈다. “갈수록 원본의 글씨가 흐려진다”며 그가 보여 준 두 장짜리 영문 팩스는 네덜란드 측이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피의자의 이름을 까맣게 지운 것이었지만 증언자의 서명은 선명했다.

그는 무척 공을 들인 끝에 네덜란드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문서를 입수했다고 설명했다. ‘현지 조달된 여성들’이란 제목으로 그가 1993년 ‘세카이(世界)’지에 쓴 기사는 그 뒤 여러 문헌에서 인용됐다.

당시 아사히신문 출판부에서 일하던 그는 1980년대 후반 업무 관계로 동남아 현지 조사를 하면서 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문제가 불거지기 전이었지만 관련 자료나 증언이 줄줄이 나왔다. 십수 차례 현지를 드나들며 증언을 청취하고 자료를 모았다. 1990년대 후반에는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를 생각하는 모임’도 만들었다.

동남아에서 일본이 저지른 악행 가운데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게 적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작은 섬에서 자행된 집단학살 사건 중에는 역사 속에 파묻혀 버린 것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그에게 일본 총리가 전쟁 책임을 부인하는 요즘의 현실은 ‘절망적’이다. “일부나마 진실이 밝혀졌는데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려는 움직임에 기가 막힌다”고 그는 한숨지었다. “위안부 문제를 좇아 온 일본인들은 이제 지친 상태”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의 말마따나 대부분의 일본인은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는 것조차 피한다. 한 일본인 기자는 “거짓말도 100번 반복하면 정말이 되나 보다”고 자조했다.

전후 60여 년. 머지않아 가해자든 피해자든 전쟁 체험자들은 사라져 갈 것이다. 궤변을 반복하는 일본인들은 그때를 기다리는 걸까. 오무라 씨 팩스의 글자가 세월과 함께 사라져 가듯이. 그러나 그렇다고 진실도 사라질까.

서영아 도쿄 특파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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