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서영아]원자바오, 얼음을 녹이는 訪日

  • 입력 2007년 4월 12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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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를 고집했던 것은 ‘중국에 거스르는 나라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대(對)중국 교육용이었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이노구치 구니코(猪口邦子) 전 일본 저출산·남녀공동참여담당 장관의 주장이다. 국제정치학자 출신인 그는 고이즈미 전 총리가 정치권으로 발탁한 이른바 ‘고이즈미 칠드런’이다.

그는 “현명한 중국은 고이즈미의 메시지를 충분히 알아들었다”고도 했다. 고이즈미가 지난해에 총리 직을 깨끗이 그만둔 것도 2008년 베이징(北京) 올림픽 등을 고려할 때 양국관계가 그쯤에서 풀려야 한다는 ‘대국적’ 판단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고이즈미에 얽힌 일화를 자랑 삼아 얘기하다가 나온 사담이지만 중국을 보는 보편적인 일본인의 시각이랄까, 중국에 쏠려 있는 한국의 현실이 묻어나는 듯해 기억에 남았다.

더군다나 확실히 중국은 변했다. 지난해 일본의 총리 교체라는 명분이 생기자 기다렸다는 듯 고이즈미 시절 ‘정랭경열(政冷經熱·정치적으로는 싸늘해도 경제 협력은 열기가 있다)’로 불리던 양국관계의 개선에 나섰다.

11일 일본을 방문하는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를 맞는 이곳의 풍경에서도 이런 분위기는 읽힌다.

“(이번 방일을) 얼음을 녹이는 여행으로 하고 싶다”는 원 총리의 말처럼 양국 간에는 훈풍이 분다. 일본 언론에서는 중국이 얼마나 분위기 조성에 노력하고 있는지를 거듭 강조한다. 미 의회에서 논란이 되는 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중국은 보도를 자제하고 있다’거나 ‘중국 미디어들이 일제히, 대대적으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사죄를 보도했다’는 것이 뉴스가 된다. 완강하게 옳고 그름을 따지며 정의를 추구하는 한국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물론 중국의 ‘변신’이 고이즈미의 ‘교육’ 때문은 아닐 것이다. 사실 중국의 일본에 대한 경계심은 한국보다 강하면 강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일본에서도 발간된 ‘저우언라이(周恩來) 키신저 기밀회담록’(이와나미 서점·2004년)에 중국의 속내가 잘 나타나 있다. 저우언라이는 1972년 중-일 국교정상화를 이끌면서 “전쟁 책임은 일본의 지도자에게 있다. 일본 국민도 피해자”라는 논리를 내세워 대일 배상 요구를 포기했고, 그런저런 연유로 지금까지도 일본에서는 호감을 사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1971년 미중 국교수립을 위해 극비 방중한 헨리 키신저 미 대통령특별보좌관과의 비공개 대화에서 일본을 이렇게 말한다.

“일본은 아주 편협하고 기묘하다. 섬나라 집단이다.”(저우)

“일본 사회는 특이하다. 일본인은 폭발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 그들은 봉건제에서 국왕숭배로 2, 3년 만에 이행했다. 국왕숭배에서 민주주의로는 3개월 만에 이행했다.”(키신저)

“그러나 그들은 다시 국왕숭배로 되돌아가려 하고 있다.”(저우)

키신저가 “일본은 매우 신속하게 (핵무기를) 만들 능력이 있다”고 하자 저우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며 “일본은 미국의 제어가 없으면 야생마”라고 했다.

36년 뒤인 지금 일본을 방문하는 원자바오 총리의 속내는, 혹은 중국 지도부의 생각은 저우언라이의 그것과 얼마나 다를까. 원 총리는 한국에서 그랬듯이 일본에서도 곳곳을 방문해 갖가지 덕담을 하고 양국 간 우호협력 관계를 다질 예정이다.

중국도 일본도 국익과 실리라는 대전제 앞에 ‘속마음은 달라도 겉으로 웃는’ 관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두 강대국 사이에 끼인 한국은 어떤가.

서영아 도쿄 특파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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