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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2월 28일 18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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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신문은 3·1운동 당시 조선군사령관이던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1861~1922) 대장이 남긴 15년분의 일기가 발견됐다고 28일 보도했다.
작성자 사후 80여년 만에 봉인이 풀린 일기에는 제암리 사건의 은폐 전말과 독립운동 진압 실태, 일본의 민족운동가 회유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돼 주목된다.
1919년 4월15일 '제암리사건'이 일어나자 우쓰노미야는 '서울 남방에서 일본군이 약 30명을 교회에 몰아넣고 학살, 방화'했다고 썼다. 그러나 일본군은 사건을 발표하면서 학살 방화 사실을 부인했다.
그 이유는 4월18일자 일기에 나온다. "(사실대로 처리하면) 제국의 입장에 심히 불이익이 되므로" 간부회의에서 "저항했기 때문에 살육한 것으로 하고 학살 방화 등은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밤 12시에 산회했다"는 것.
이튿날 일기에는 "사건에 관여한 중위를 진압 방법과 수단이 적정치 않았다는 점에서 30일간 중(重) 근신에 처하기로 결심했다"고 적었다. 신문은 실제로 해당 중위에 30일간의 근신처분이 내려진 사실이 있다고 확인했다.
일기에 따르면 우쓰노미야는 당초 조선 민중의 저항에 나름대로는 이해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3·1운동이 시작되자 우쓰노미야는 일본이 펼쳐온 '무단 통치' 방식을 비판하며 "조선인의 원망과 한탄 동요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일기에 적었다. 그는 독립운동은 기독교도와 천도교도, 학생 등이 주도해 외국인 선교사의 후원을 받아 봉기한 것으로 뿌리가 깊다고 분석하며 '무단 통치'가 "내켜하지 않는 처녀를 무리하게 결혼시킨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소요가 갈수록 확산되자 그는 "지금까지의 진압수단으로는 도저히 대처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3월 11일 조선총독으로부터 군 동원을 허가받아 진압을 시작했다.
한편으로 일기에는 우쓰노미야가 훗날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濟藤實) 시대에 진행된 '문화정치' 시책을 한발 앞서 시작한 사실도 나타난다.
그는 3·1운동 와중에 천도교에 대한 회유를 제안하고(1919년 3월 20일), 장차 조선에 '자치'를 허용해 '자치식민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본국에 진언하기도 했다(5월 1일 육군대신 다나카 기이치 田中義一에게 보낸 서한). '배일파'(排日派)로 알려진 조선인과의 접촉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1920년 2월20일, 4월9일).
일기에는 3.1독립선언에 서명한 한 종교지도자가 2월 27일 그를 찾아와 "이번 고종의 국장 때 뭔가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충고했다는 내용도 보인다.
우쓰노미야가 남긴 사료는 일기 15권외에도 서한 약 5000통과 서류 약 2000점, 사진 약 200점 등 7200여점에 이른다. 이 사료는 도쿠마 참의원을 거쳐 손자 교조(恭三) 씨가 보관해오다 5년 전 기라 요시에 교수 연구진에 위탁됐으며 '우쓰노미야 다로 관계자료연구회'의 이름으로 문부과학성 보조금을 받아 18명의 연구위원이 자료 정리 작업을 해왔다.
자료 중에서 일기는 4월 이후 이와나미(岩波)서점에서 3권으로 정리돼 발간될 예정이다. 조선독립운동 관련기록이 몰려있는 1919년 전후는 뒷부분에 해당해 11월 이후에야 나올 전망이다.
우쓰노미야 대장은 일본의 군축을 주장하고 대 아시아 외교에 적극적이었던 우쓰노미야 도쿠마(宇都宮得馬·1906~2000)전 일본 참의원의 부친으로도 알려져 있다.
도쿄=서영아특파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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