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지붕밑]“드레퓌스를 팡테옹으로”

  • 입력 2006년 6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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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시작된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유대계 육군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사진)는 군사 기밀을 독일에 넘긴 혐의로 체포됐다. 군부는 비밀 재판을 열고 반역죄를 적용했다. 결정적 증거가 없었음에도 당시 프랑스 사회에 만연된 반유대주의에 편승해 희생양으로 만든 것. 정의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12년이 지난 1906년 7월 12일, 드레퓌스는 최고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뜻 있는 이들의 줄기찬 투쟁이 이뤄 낸 승리였다. 프랑스에 정의가 회복된 날이다.

그로부터 100주년. 최근 프랑스에서는 드레퓌스 사건을 기리는 전시회와 토론회가 이어지고 있다. 드레퓌스의 무덤을 팡테옹으로 옮기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소르본대 근처에 있는 팡테옹은 볼테르, 빅토르 위고, 퀴리 부인 등 위인들이 묻혀 있는 곳.

역사학자인 뱅상 뒤클레르 씨는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절망적 상황에서도 진실을 위해 싸웠던 드레퓌스는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가치를 대표한다”면서 “요즘도 사라지지 않은 반유대주의에 경종을 울리는 차원에서라도 묘를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원 고위 간부인 장 루이 나달 씨도 라디오 인터뷰에서 “팡테옹이 위인을 위한 장소라면 정의를 위해 싸운 드레퓌스는 당연히 그곳에 있어야 한다”고 동의했다. 팡테옹 이전 결정은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들은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혁명 기념일인 7월 14일에 묘소 이전을 선언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팡테옹에는 드레퓌스 사건의 물줄기를 바꿔 놓은 소설가 에밀 졸라의 묘소도 있다. 드레퓌스가 종신형을 선고 받고 유배된 뒤 진범의 윤곽이 드러났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 때문에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졸라는 그런 분위기를 깨고 1898년 신문 ‘로로르(새벽)’에 대통령을 향한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드레퓌스의 무죄 방면을 주장했다. ‘나는 고발한다’로 시작하는 유명한 글이다.

그런 졸라와의 인연 때문에 묘소 이전을 요구하는 이들은 현재의 몽파르나스 묘지보다 팡테옹에 있는 졸라의 묘소 옆이 드레퓌스에게 더 어울린다고 주장한다.

파리=금동근 특파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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