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여성 2인, 역사연구로…詩번역으로… “한국, 내사랑”

  • 입력 2006년 2월 22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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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관대첩비’ 인연 오다씨

“한국인들에게 정말 미안합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도 함께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 앞뜰에서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해체작업을 지켜보던 오다 아키에(小田章惠·61·여·사진) 씨는 아쉬운 듯 눈물을 흘렸다.

일본 도쿄(東京)의 야스쿠니(靖國)신사에 방치돼 있다 100년 만에 환국한 북관대첩비는 이날 특수포장돼 3월 1일 북한의 함경북도 길주로 간다.

오다 씨는 북관대첩비가 야스쿠니신사에 눕혀진 채 방치돼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세울 것을 요구했던 누키 마사유키(貫井正之) 한일역사연구회장의 제자. 북관대첩비가 곧 북한으로 옮겨진다는 소식을 듣고 17일 부랴부랴 나고야(名古屋)에서 서울로 달려왔다.

그의 한국 사랑은 당대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지냈고 아버지(나카니시 미쓰오·中西光夫·82)도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신의주에서 살았다.

나카니시 씨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장수로 조선에 왔다가 “명분없는 전쟁에 참여할 수 없다”며 귀순한 김충선(金忠善·일본명 사야가) 장군을 30여 년 동안 일본에 알려 왔다. 아버지의 일을 돕다 오다 씨도 자연스럽게 ‘애한파(愛韓派)’가 됐다. 주변에 형편이 어려운 한국 유학생이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자신의 집으로 불러 돈을 받지 않고 머물게 해 줬다.

북관대첩비를 바라보는 애절한 눈길에도 가족사가 숨어 있다.

“어릴 때 돌아가셨다는 작은아버지 묘가 아직 평안북도 신의주에 있습니다. 아버지는 꼭 한번 북한에 가서 묘를 돌아보고 싶다고 하셨죠.”

그는 한일 관계가 대립을 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기를 소망했다.

“한류 덕분에 민간의 관계는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저도 좋은 인연을 맺은 한국인 ‘아들’ ‘딸’이 많습니다. 이제 정치적 갈등도 잘 해결돼 사이좋게 지내면 좋겠습니다.”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 시인 故이바라기씨

한국 시를 누구보다 사랑했고 일본어로 가장 완벽하게 번역해낸 일본의 여류시인이 영면했다.

아사히신문 등에 따르면 한국 시인 12명의 시를 실은 일본어 번역시집 ‘한국현대시선’을 펴내 1991년 요미우리문학상을 수상한 이바라기 노리코(사진) 시인이 최근 자택에서 별세한 것으로 확인됐다. 향년 79세.

한국현대시선은 출간됐을 당시 번역시집이 아니라 창작시집 같다는 평이 지배적이었을 정도로 작품성을 높이 평가받았다.

번역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영역에 속하는 시 번역을 이처럼 뛰어나게 해 낸 이바라기 시인이 한국어 공부를 처음 시작한 것은 모국어를 공부하기도 쉽지 않은 50세 때였다. 당시는 한국어를 배운다고 하면 모든 일본인이 “왜 하필 한국어냐”고 물을 정도로 한국을 무시하던 때다. 이바라기 시인이 ‘한글에의 여행’이라는 에세이집에서 “오싹하다”고 썼을 정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한국어 공부에 이바라기 시인이 혼신의 힘을 쏟은 이유는 홍윤숙(洪允淑) 시인과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

이바라기 시인은 홍 시인이 일본어를 무척 잘하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다. “학생 때부터 배워서”라는 대답을 들은 이바라기 시인은 자신의 둔감함을 뼛속 깊이 뉘우쳤다. 이바라기 시인은 많은 일본인에게 27세의 젊은 나이로 일제의 형무소에서 요절한 한국의 민족시인 윤동주(尹東柱)를 알게 해 준 시인으로도 기억된다. 이바라기 시인이 윤동주에 대해 쓴 수필이 1995년 일본의 한 출판사가 펴낸 고교 현대문 교과서에 실렸던 것.

이바라기 시인은 ‘윤동주’라는 수필에서 “그는 일본 검찰의 손에 살해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통한(痛恨)의 감정을 갖지 않고는 이 시인을 만날 수 없다”고 썼다.

도쿄=천광암 특파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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