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리다르노시치 25주년]<상>요한 바오로2세와 폴란드

입력 2005-11-14 03:01수정 2009-09-30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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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리다르노시치’의 지도자였던 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왼쪽)과 그단스크 시 ‘그린게이트’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대담한 뒤 기념 촬영한 최정호 객원 대기자.
‘프라하의 봄’과 ‘바르샤바의 가을’은 동유럽의 대표적인 음악제 이름인 동시에 두 수도의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다. 유명한 뒤몽 출판사의 ‘유럽예술관광총서’ 폴란드 편을 보면 음악에 관한 장(章)에 두 사람의 그림만 싣고 있다. 애인 조르주 상드가 그린 쇼팽의 그림과 만화가 에드문드 만차크가 그린 펜데레츠키의 그림. 전후에 등장한 세계의 작곡가 중에서 스트라빈스키는 펜데레츠키를 가장 높이 평가했다고도 한다.

1985년 이탈리아 여행 중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 펜데레츠키가 자신의 ‘폴란드 진혼곡’을 직접 지휘한 연주를 처음 들었다. 공연이 끝난 뒤 그를 만난 인연으로 그에게 한국을 주제로 한 ‘교향곡 No. 5 Korea’ 작곡을 위촉하게 된 것을 필자는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올해 9월 방한한 펜데레츠키는 요한 바오로 2세를 추모하는 신작 ‘샤콘’을 한국의 청중에게 들려줬다. 20년 만에 만난 그는 이것을 ‘폴란드 진혼곡’의 마지막으로 삼아야 되겠다고 귀띔해 주었다.

‘폴란드 진혼곡’은 여러 계기로 여러 사람의 죽음을 위령하면서 이뤄졌다. 시작은 1970년 그단스크 노동자 봉기(蜂起)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비 개막을 위해 1980년 ‘솔리다르노시치(연대)’가 그에게 진혼곡을 맡기면서부터다.

과거 동유럽 공산권에서는 여러 차례 반체제 봉기가 있었다. 1953년 동베를린 노동자의 반공 시위, 1956년 헝가리 국민의 자유화 투쟁, 1968년 체코의 ‘프라하의 봄’이라 일컫던 개혁운동 등. 그러나 모든 봉기는 소련군의 무자비한 유혈 진압으로 끝장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폴란드는 정치적 전환의 고비마다 비교적 평화적으로 위기를 극복해 온 셈이다. 1956년 공산권의 소위 해빙기(解氷期)에 크렘린과 대립 각을 세웠던 임레 너지 총리의 부다페스트가 소련의 개입으로 참혹한 피의 헝가리 광시곡 무대가 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고무우카가 권좌에 복귀한 폴란드는 해빙기의 권력 이동을 비교적 무난히 소화해 냈다.

1979년 폴란드를 방문해 9년 전 일어난 그단스크 봉기의 희생자추모탑 앞에서 기도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뿐만 아니라 폴란드는 1980년대 소비에트 체제하에서 최초로 반체제 자유노조를 결성하여 계엄령 치하를 뚫고 합법 비합법 투쟁을 전개하며 당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 마침내 부분적 점진적 자유선거를 쟁취해 냈다. 공산주의체제에서 처음 있는 이 획기적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1980년대 말에는 동유럽 전체가 자유화되는 대역사를 이루게 된다.

일당 독재체제의 평화적 해체와 민주화의 길,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오늘의 북한 체제를 지켜보고 한반도의 미래를 생각할 때 궁금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1980년대 폴란드의 체제 전환 과정을 살펴보면 세 사람의 주역이 금세 시야에 들어온다. 그단스크의 노조 지도자 레흐 바웬사, 바르샤바의 실력자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장군, 그리고 크라쿠프의 추기경 카롤 보이티와(훗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폴란드의 사회와 정부 그리고 교회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다.

폴란드의 가톨릭교회는 나치와 소비에트 전체주의에 저항하는 힘의 거점이었다. 그에 앞서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폴란드가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린 망국의 140여 년 동안에도 가톨릭교회는 폴란드 민족을 하나의 문화적 공동체로 유지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나치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에 참여해 전 성직자의 4분의 1이 살해되는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그중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형에 처해질 젊은이를 대신해 자기 목숨을 내놓은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도 있었다. 1982년 콜베 신부가 로마 교황으로부터 성인으로 추증됐을 때 펜데레츠키는 ‘폴란드 진혼곡’의 일부인 ‘디에스 이라에’(최후의 심판일)를 작곡했다.

2차 대전 후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폴란드 저항운동의 중심에는 스테판 비신스키 추기경이 있었다. 그가 재판도 받지 않고 3년 동안 감금됨으로써 국내외의 항의 파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85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스칼라극장에서 펜데레츠키의 ‘폴란드 진혼곡’이 공연될 당시 프로그램 표지.

폴란드 현대사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된 사건은 1978년에 일어났다. 그해 10월 16일 보이티와 추기경이 폴란드인으론 처음으로 교황에 선출된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 비(非)이탈리아 계로는 456년 만에 교황으로 선출된 요한 바오로 2세는 장차 동유럽 소비에트 체제가 총체적으로 붕괴되는 세계사적 변혁의 물꼬를 트게 된다. 그 서주가 1979년 교황의 폴란드 방문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고국 방문은 크라쿠프, 바르샤바 등 가는 곳마다 수십만 명이 운집하는 인파의 태풍을 몰고 왔다.

10월 28일 자신의 사무실에서 필자를 만난 바웬사는 “믿는 사람도 안 믿는 사람도 다 같이 한자리에 모여 십자가를 그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나는 1970년의 무참히 짓밟힌 봉기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당시 그단스크의 유혈 진압 후 우리는 고립되었다. 그래서 1980년 자유노조연대를 조직할 때까지 나는 10명의 동지와 10년 가까이 외로운 싸움을 하며 버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교황의 폴란드 방문 이후 이 10명이 10만 명이 되고 급기야 1000만 명이 됐다.”(1000만 명이란 숫자는 바웬사뿐만 아니라 교황의 폴란드 방문에 불안해하던 공산당이 기록한 숫자이기도 하다. 그건 폴란드 국민 중 성인의 절반을 의미한다.)

“폴란드 체제 전환의 성공 요인이 무엇이냐고? 그 50%는 단연 교황의 힘이었지. 나머지 30%가 솔리다르노시치의 힘, 그리고 20%는 고르바초프, 옐친 덕이었다”고 바웬사는 잘라 말했다.

2차 대전 후 동서 분단의 세계사를 바꾸게 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폴란드 방문이 공산당 치하에서 어떻게 가능했을까. 정부의 고위층과 협상해 그의 방문을 허용하도록 설득한, 교황보다 20년 연상의 비신스키 추기경의 공로였다. 그것은 고국에 대한 성직자로서의 마지막 봉사이기도 했다. 1981년 비신스키 추기경이 타계했다는 부음을 들은 펜데레츠키는 그날 밤 망자의 넋을 달래는 ‘폴란드 진혼곡’의 또 다른 일부 ‘아그누스 데이’(하느님의 어린 양)를 작곡했다.

최정호 객원 大記者 동유럽 리포트-바르샤바(폴란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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