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관대첩비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

  • 입력 2005년 10월 24일 17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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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해 100년 전 약탈돼 일본 야스쿠니(靖國)신사에 방치됐던 임진왜란 승전비인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연합]
일제에 의해 100년 전 약탈돼 일본 야스쿠니(靖國)신사에 방치됐던 임진왜란 승전비인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연합]
“북관대첩비의 비문 내용은 사실과 전혀 다르니 믿지 말라.”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일본군 2사단 17여단장 이케다 마사스케(池田正介) 소장에 의해 강탈당했던 북관대첩비가 지난 20일 100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케다는 당시 임명진에서 북관대첩비를 발견, 자신들의 패전 기록인 이 비석을 수치로 여겨 일본으로 가져갈 것을 상부에 건의했고 그해 10월28일 일본으로 넘어갔다.

일본은 북관대첩비를 도쿄(東京)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보관 전시했다. 비 옆에는 비문의 내용을 소개하는 목패(木牌)를 만들어 세웠다. 하지만 목패의 내용이 상당부분 왜곡돼 있었던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1926년 9월16일 일본을 방문해 북관대첩비를 직접 보고 온 이생(李生)은 당시 동아일보에 기고문을 보내와 목패에 새겨진 글을 소개하고 소감을 밝혔다.(동아일보 1926년 9월19일자 3면)

목패에는 “북관대첩비는 함경도 명천군 임명진에 있었는데 일본이 조선과 전쟁한 사실을 기재하였다. 그 비문에는 대첩(大捷)이라고 하였지만, 그 당시 사실과는 전연상위(全然相違)하니 세인(世人)은 비문을 믿지 말라.”고 적혀있었다.

하지만 이생은 기고문에서 “우리 조선인은 고래(古來)부터 패하고서 이겼다고 자찬하며 비석을 세우는 일이 없는 이상에 그 비문의 당당한 정신을 우리가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 당시 동아일보 문예면에 실린 이생(李生)의 기고문

그는 또 “무슨 곡절로 비석이 이곳에 이전되었는지는 알지 못하나 옛날의 전례로 추측하여 보면 일본이 강탈한 것이 사실일 것”이라며 “우리의 사적(史蹟)이 임명진에 있다가 이역의 일본 땅에 방치 당하고 있는 사실을 깊이 기억(記憶)하여 두자”고 썼다.

그는 야스쿠니신사를 “(일본) 국가전사장졸의 초혼제가 매년 봄, 가을로 거행되는 곳으로 그 내부에는 조선 고대의 갑옷, 군기(軍旗), 창(槍), 총(銃), 대포(大砲) 등과 청, 러, 독 전쟁시에 획득한 전시기계를 다수로 진열해 일반에게 관람하게 하였다”고 소개했다.

그는 “필자도 관람하려 들어가 보니 후면 정원에 높이가 5자, 넓이가 2자, 두께가 5치 가량의 웅장한 비석이 서 있어서, 그 비석을 정면에 서서보니 북관대첩비라 새겨져 있었다. 경악하여 비문을 자세히 보려하니 헌병이 제지하여 보지 못하고 비석 좌측의 목패만 봤다”고 일화를 전했다.

1926년은 6.10만세 운동과 김구 선생의 임정국무령(臨政國務令) 취임, 의열단원인 나석주(羅錫疇)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등으로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시기였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상당부분에서 일본을 비난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이생의 글이 신문에 실렸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한편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 때 정문부(鄭文孚)를 대장으로 한 함경도 의병의 전승을 기념한 전공비이다. 높이 187cm 너비 66cm, 두께 13cm이다.

본문에는 함경도 의병이 가토 기요마사가 거느린 왜군을 무찌르는 내용과 왜란이 일어나자 반란을 일으켜 함경도로 피난한 두 왕자를 왜적에게 넘긴 국경인(鞠敬仁)을 처형한 전말 등이 1500자 비문에 소상히 적혀있다. 기요마사는 당시 일본 최강의 조총군단을 이끌고 북진을 거듭했으나 여기서 패해 다시는 함경도 이북을 넘보지 못했다.

비는 조선 숙종 때 함경도 북평사(北評事)로 부임한 최창대(崔昌大)가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에 세웠다.

조창현 동아닷컴 기자 cc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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