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영균/외환위기와 중국 쇼크

  • 입력 2004년 5월 5일 18시 38분


4월 총선 직전 미국 뉴욕 월가에서 은행가로 일하는 재미교포가 중국을 방문했다가 서울에 들렀다. 심상치 않은 중국 경제를 직접 살피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중국 경제의 거품이 곧 붕괴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륙에서 거품이 걷히기 시작하면 한국 경제가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총선 분위기에 들떠 있던 서울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총선에 열중하고 있던 터라 ‘아닌 밤중에 봉창 두드리는 소리’ 정도로 무시되고 있었다. 긴가민가해서 한 고위 경제관리에게 직접 확인해 보았지만 “중국 경제의 거품은 우려할 만한 상황이 아니며 오히려 중국은 잘나갈 것이다”는 낙관론만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총선이 끝나고 불과 10여일 후 중국에서 날아온 소식은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들어 놓았다. 지난달 말께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과열된 중국 경제를 진정시키기 위해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긴축방침을 밝힌 뒤 몰아닥친 이른바 ‘중국 쇼크’로 주가가 폭락하고 세계경제의 불황을 걱정할 정도가 됐다. 특히 중국 수출에 대한 의존도가 큰 한국은 그 충격이 더했다.

중국은 이미 미국보다 우리 상품을 더 많이 사가는 최대 수출시장이다. 한국 기업이 가장 투자를 많이 하는 곳이기도 하다. 중국의 동향에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게 바로 한국이다.

얼마 전까지 중국 때문에 원자재 가격이 올라 걱정했던 때와 정반대로 중국 경제의 거품이 꺼질까봐 노심초사(勞心焦思)하는 처지가 되었다. 중국이 너무 잘되어도 걱정이고 못돼도 걱정인 것이다.

과거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컸을 때 ‘미국이 재채기를 하면 한국은 독감에 걸린다’고 했다. 이젠 중국이 미국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쳤을 때 우리 경제가 취약했던 것처럼 중국 의존도가 심해진 지금 역시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러나 문제는 과도한 중국 의존에 대해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중국을 ‘경제측면에서 가장 중요시해야 할 나라’로 꼽고 있다. 중국 진출을 서두르지 않으면 손해만 본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미국 의존은 곤란하고 중국 의존은 괜찮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우리 정부는 뒤늦게 경제장관회의를 열고 대책을 마련하느라 부산하다. 하지만 사태를 해결할 뾰족한 대책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낙관도 비관도 아닌 어정쩡한 분석과 대책이 고작이다.

정부의 이런 태도를 보면서 1997년 말 치욕스러운 외환위기 때의 악몽이 떠오른다. 당시 외환위기의 발단은 그해 7월 태국에서 발생한 통화위기였다. 외국 언론들은 위기가 코앞에 왔다고 하는데도 대통령선거에 열중한 정치권과 고위 경제관료들은 낙관론만 주장했었다.

이번 중국 쇼크에 우리 금융시장이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이라면 다행이다. 하지만 미국의 은행가가 긴급히 상하이로, 홍콩으로 달려갔을 때 우리 정부와 금융계는 장밋빛 경제전망을 내놓기에 바빴다. 총선 때문에 그랬다는 변명을 다시 듣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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