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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4월 9일 18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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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9일 일본인 3명이 이라크 무장세력에 납치돼 살해 위협을 받고 있지만 물러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거듭 정면돌파 방침을 밝혔다.
집권 자민당의 대다수 의원들도 “자위대 파병은 이라크 평화와 부흥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라며 철수 불가론에 가세했다.
여론도 지금은 ‘테러에 무릎 꿇을 수 없다’는 명분론이 ‘무고한 인명 피해를 막아야 한다’는 현실론을 압도하는 양상이다.
하지만 무장세력들이 예고한 대로 11일 밤 인질로 잡힌 3명이 희생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상황은 예측하기 어렵다. 마이니치신문은 “고이즈미 정권이 2001년 4월 출범 이후 최대의 시련을 맞았다”고 보도했다.
▽충격받은 일본열도=무장집단이 인질의 눈을 가린 채 목에 칼을 들이대는 장면이 TV로 방영되자 일본열도는 충격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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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납치된 일본인들이 열화우라늄탄 사용에 반대해 온 반전운동가 이마이 노리아키(今井紀明·18), 전쟁의 참상을 사진으로 전한 자유기고가 고리야마 소이치로(群山總一郞·32), 고아 구호활동을 벌여 온 여성 자원봉사자 다카토 나오코(高遠菜穗子·34) 등 반전 쪽에 서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충격의 강도는 더하다.
일본 언론은 자위대 파병 후 일본인을 겨냥한 첫 테러 협박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일본 정부는 파병 후 방어능력이 없는 민간인을 인질로 삼는 범죄를 가장 걱정했는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하루 전 자위대 주둔지 부근에 포탄이 떨어졌을 때만 해도 “자위대를 철수시키려는 위협”이라며 여유 있는 표정이었으나 8일 밤 피랍 사실을 보고받고는 충격을 받은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납치된 사람들이 소속된 비정부기구(NGO)측은 “이번 사태는 미국을 따라 자위대를 이라크에 보낸 정부의 책임”이라며 조기 철수를 촉구했다.
제1야당인 민주당의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국회대책위원장도 “고이즈미 총리의 책임을 따져봐야 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진퇴양난에 빠진 일본 정부=도쿄의 외교소식통은 “고이즈미 총리는 정치 생명을 걸고 자위대를 파병한 만큼 중간에 발을 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일본 정부는 자위대를 철수시킬 경우 다른 파병 국가들에 영향을 미쳐 동맹국인 미국을 더욱 곤경에 빠뜨릴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민간인 납치로 저항세력의 요구가 관철되는 선례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도 일본 정부의 원칙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일본 정부의 고민은 미국과의 공조를 다짐하고 있지만 사건 해결을 위해 독자적으로 손을 쓸 여지가 거의 없다는 점. 인질구출 대책반의 실무자들은 “무장집단이 알려지지 않은 조직이어서 저쪽에서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할 처지”라고 답답해했다.
▽고이즈미, 또 한번 도박할까=이라크전쟁 발발 이후 일관되게 미국을 지지해 온 고이즈미 정권의 ‘미국 추종외교’는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중대한 시험대에 올랐다.
여론은 테러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쪽이 우세하지만, 돌발사태가 계속되면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집권여당이 참패해 정권이 바뀌는 사태로 발전할 수도 있다.
일각에서는 상황이 악화되면 자위대 안전에 필요하다는 논리로 오히려 병력을 증파하거나 무장을 더욱 강화해 자위대의 활동영역을 넓히려 할지도 모른다는 분석도 내놓는다.
도쿄=박원재특파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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