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크 영어와도 '외로운 투쟁'…자국어 지키기 안감힘

  • 입력 2003년 3월 4일 19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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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미국의 ‘이라크 전쟁 밀어붙이기’에 대항해 외로운 싸움을 하는 동안 프랑스는 유럽연합(EU) 내에서 또 다른 싸움을 벌이고 있다. 싸움의 대상은 영어. 그러나 승산이 거의 없기는 이라크 전쟁이나 매한가지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EU 집행위 사무실에 근무하는 프랑스인 브뤼노 드 토마는 “내가 브뤼셀의 EU 본부에 근무하던 1995년까지만 해도 내 책상에 오는 서류의 70%가 프랑스어로 쓰였으나 지금은 70%가 영어”라고 말했다고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최신호(1일자)가 전했다.

당시 드 토마씨는 프랑스 출신 EU 집행위원장 자크 들로르의 대변인이었다. 유럽통합에 큰 족적을 남긴 들로르씨가 95년 집행위원장직을 떠날 때까지도 프랑스어는 EU 기구 내의 실무 언어였다.

그러나 이후 EU 내에서 영어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신장됐다. 현재 EU 15개 회원국 내에서 영어를 모국어나 제1외국어로 쓰는 인구는 47%. 프랑스어 사용 인구는 26%에 불과하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EU 내 비영어권 중학교의 92%가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2004년 중·동유럽 10개국이 EU에 추가 가입하면 영어의 비중은 더 커진다. 새로 가입하는 10개국의 대부분이 영어를 제1외국어로 채택하고 있기 때문.

프랑스가 최근 엘리제조약(프-독 우호조약) 체결 40주년을 맞아 독일과 밀착한 것도 영어권 확대에 따른 위기감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시라크 대통령이 프랑스의 EU 내 영향력 유지를 위해 독일과의 ‘2강구도’로 EU를 끌고 나가려 했다는 것.

그러나 밀착한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상대국 언어보다는 영어 배우기에 열중인 게 현실이다.

프랑스는 EU 특허권법 제정 과정에서도 영어만 특허 언어로 사용되는 것을 반대하는 등 ‘프랑스어 지키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으나 대세를 막기는 역부족.

EU 집행위의 고위 관료인 프랑스인 피에르 데프레뉴는 “영어라는 언어보다 영미식 사고방식의 확산이 더 두렵다”고 말했다.

파리=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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