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0년 6월 25일 19시 42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제1회의]의미와 유산
▽‘알파와 오메가:한국전쟁의 의미에 관한 연구’(폴 피에르파올리 미국 버지니아사관학교 교수)〓한국전쟁은 냉전의 범세계적, 지역적 시발을 알린 사건이다. 이 전쟁은 2차 세계대전이후 패권장악을 위한 헤게모니의 관점과 담론을 재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냉전의 진정한 ‘알파’(시작)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두개의 한국이 하나로 되기 전까지는 엄밀히 말하면 냉전이 끝났다고 하기 어렵다. 이것이야말로 냉전의 진정한 종결을 나타내는 것이고, 또 거대한 투쟁의 ‘오메가’(마지막)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이었다. 한국전에 참여했던 미군들도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채 잊혀졌다. 이는 외교사적으로 볼 때 미국이 이례적으로 ‘완승’을 거두지 못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은 외교 군사 국방 및 국내정책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대외정책의 관점에서 볼 때 군사력을 근간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계기가 됐다.
대만을 방어하기 위해 미중 관계 악화를 무릅쓰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을 강화시키는 등 세력균형의 변화를 낳았다. 이처럼 한국전쟁의 긴 그림자는 수십년간 미국사회를 지배해왔다.
▽한국전쟁과 한국의 근대국가 재형성:군의 성장과 성격변화를 중심으로(서주석·徐柱錫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한국의 국가형성은 분단정부 수립이라는 특수상황에서 진행돼 다른 국가보다 정치적 긴장도가 클 수밖에 없었고 한국군도 창설초기부터 비상한 정치적 임무를 수행했다. 한국군은 한국전쟁으로 장기간 대규모 전투를 치러야 했고 전쟁 후에도 북한위협의 억지 및 휴전상태 유지를 위해 대병력을 유지해야 했다.
한국전쟁의 군사적 영향은 이런 양적 팽창 및 질적 성장과정에서 출발한다. 전쟁과정을 통해 확장된 군대는 고군비 부담의 근원이 되었고 이는 국가재정 및 국민 조세부담으로 나타났다. 대외적 위상과 관련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유엔군사령관에게 일임된 것은 한국군의 자주성에 심각한 제한을 가했다.
한국군의 증강은 한국사회에서 군의 위상을 크게 높이면서 점차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됐다. 북한의 재침에 대비해 항상 대군을 유지하는 일은 한국의 국가성격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의 전반적 국가능력에 비춰 이는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었고 ‘군사국가화’ 경향이 회피될 수 없었다. 60년대 이후 수십년간의 군부통치는 결국 이같은 경향이 정치적으로 표출된 데 지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의 사회학:사회의 변화와 사회적 유산(전상인·全相仁한림대교수)〓한국전쟁이 부른 사회변동은 이중적이고 양면적 성격을 지닌다.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볼 때 국민적 평등화와 기회균등 원칙의 밑그림을 그린 한편, 다양한 사회영역에서의 불평등구조를 제도화하면서 새로운 기득권을 차지한 파워엘리트를 탄생시켰다.
특히 정치적 측면에서 국민적 평준화를 낳아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으나 ‘높은 국가성’과 중산층이 없는 ‘낮은 계급성’으로 인해 권위주의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
사회심리적 측면에서도 한국전쟁은 국가관 이데올로기 공동체주의 대외의식 등의 모든 측면에서 이율배반적 변화를 불렀다. 이는 전후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경제발전 사회갈등 사회의식 등 거의 전분야에 걸쳐 긍정적, 부정적 효과를 동시에 나타냈다.
특히 한국전쟁은 사회문화적 공동체의식의 파괴를 통해 한국사회를 극단의 저신뢰사회로 만들었다. ‘레드 콤플렉스’의 실제와 과장에 의해 불신과 경계가 만연한 야만적 전투사회의 형태를 띠도록 했다. 한국전쟁으로부터 진정한 역사적 교훈을 얻는 것은 선악(善惡)의 이분법적 관점이 아니라 사회변동 및 사회적 유산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진단 분석하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인권 유산들:민간인 집단학살과 북한억류 한국군 포로(허만호·許萬鎬경북대 교수)〓광복 후 한국의 국가건설에서는 다양한 이념과 시각들이 제도권 내에서 평화적으로 공존하지 못했다. 정치가들이 민주절차를 무시하고 대표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사회 경제적 갈등요인들이 증폭되면서 엄청난 폭력을 야기했다.
좌우익 모두 폭력을 자행했으나 그간 한국사회에서는 우익의 일방적 자기정당화만 허용됐다. 그러나 국민화합과 통일된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한국정부는 이제라도 대량학살사건들에 대해 체계적이고 균형있게 조사, 피해자에 대한 배상과 명예회복조치를 취해야 한다.
국가 위기상황 속에서 국가를 위해 헌신하다가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와 그 가족에 대한 정부의 노력은 ‘정통성 확보’라는 측면에서 이산가족 상봉문제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하다.
포로송환문제는 유엔인권관련기구나 국제적십자, 국내인권단체 등을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4자회담이나 남북정상회담 후속조치로 가동될 고위급 회담에서 이 문제를 하나의 독립의제로 상정해 다루는 것이다. 이것이 어려우면 남북기본합의서의 교류협력부문 이행문제를 협의하는 단계에서 이 문제를 부속의제로 다루는 방법도 가능할 것이다.
▽토론〓냉전을 심화시킨 한국전쟁의 역사적 의미와 21세기를 맞은 현시점에까지 미치는 전후 영향이 부각됐다.
김영호(金暎浩)성신여대교수는 “냉전의 기원은 한국전쟁이 아니라 미국의 마셜플랜이 유럽사회를 변화시킨 일련의 과정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폴 피에르파올리 교수는 트루먼 미국대통령이 의회동의 없이 한국전쟁에 미군을 파병키로 결정함으로써 미 헌법주의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하지만 별다른 대안이 없지 않느냐”고 의문을 나타냈다. 이에 폴 피에르파올리 교수는 “미 의회가 당시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낸 점에서도 신속하게 동의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온창일(溫暢一)육군사관학교 교수는 “한국전쟁은 내부적으로 기존사회와 가치체계의 변경을 급속하게 가져왔다”며 “그러나 자유체제를 지킨다는 목적을 위해 ‘서툰 집단’이 획일적 가치체계를 제시했다는 것이 문제”라며 군부의 정치참여문제를 거론했다.
박명규(朴明圭)서울대교수는 “한국전쟁은 일반 국민의 삶의 공간에 복합적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라며 “전쟁이후 나타난 공동체의식의 파괴와 저신뢰사회 구조 등의 부정적인 측면의 배경에는 일본의 식민통치기간에 왜곡된 사회구조로 인한 탈선과 도덕적 와해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조성훈(趙成勳)한남대강사는 “박재규(朴在圭)통일부장관이 법적으로 포로가 없다고 말해 논란이 벌어지는 것도 한국전쟁시 미귀환 포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연구와 인식이 미진하기 때문”이라며 국군포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진지한 접근을 촉구했다.
[제2회의]주변국가 입장
▽‘한국전쟁 유산 극복을 위한 방안:한반도 평화를 위한 미국의 역할’(마크 베리 미국 피닉스대 겸임교수)〓한국전쟁에서 미국이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몇가지 중요한 결정을 잘못 내렸다. 한반도 분단 자체가 그렇다. 38선이 그어진 것이나 50년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애치슨 라인’을 발표해 한국을 방위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한반도가 미국에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공포한 것이다.
최근 공개된 구(舊)소련 기밀문서를 보면 미국이 50년대 초반에 한국방어 입장을 명확히 했더라면 김일성이 남침을 하지 않았을 것으로 이해된다. 최근에도 미국은 아시아 금융위기가 닥치자 국익만을 위해 국제통화기금(IMF)과 함께 신중상주의정책을 취하는 등 아시아경제위기에 잘못 대처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제 우리는 냉전후기가 아닌 전혀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유일 강대국으로서의 책무를 가진 미국은 전세계의 공영을 위해 힘을 발휘하고, 정책개발의 동기를 좀더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남북정상회담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속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떤 변화가 오더라도 한반도의 화해협력에 있어 긍정적 변화가 올 것으로 기대한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을 한국에 넘겨주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21세기 한반도 평화문제에 관한 러시아의 접근방식’(알렉산드르 보론초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 연구원)〓한반도에서 중요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러시아는 구소련 볼셰비키 혁명에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대외정책에서 큰 변화를 거듭해왔다. 그러나 국가이익을 추구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고 있다. 한반도는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국가다. 러시아 안보와 직결된다는 뜻이다. 스탈린이 북한지역에 공산정권을 세우려고 노력한 것은 외세의 점령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러시아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바라고 있다. 러시아는 남북한 모두를 독립국가로 인정하고 있으며, 양국 모두 러시아의 주요 우방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러시아는 우호적이고 협력적인 관계를 남북간에 구축하려고 한다. 남북정상회담으로 남북은 이제 중요한 발전단계에 들어섰다.
러시아와 한국관계는 경제위기 상황에 따라 실망했던 경험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 김대중정권의 대북 및 대러정책의 우호적 전환은 괄목할 만하다.
과거 한국의 대러정책은 대북정책의 일환으로만 생각됐었다. 그러나 이제 러시아와 독립된 관계를 설정하기 위한 노선을 밟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1950∼53년: 중국개입의 목적과 영향에 관한 재고찰(장슈광 미국 메릴랜드대교수)〓50년 10월말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은 전세계를 경악시켰다.
첫째, 공산혁명에 성공한지 1년이 채 안된 시점에서 국가기반을 다지기도 전에 한국전쟁에 개입했던 점에서다.
둘째, 신생국가였던 중국이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과 직접 전쟁을 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충격이었다.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은 농민군대와 다름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한국전쟁 개입을 결정한 것은 군사전략적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만주국경으로 진입해온데 대해 중국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느꼈다.
이런 측면에서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배경은 문화적 접근방식으로 분석해보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중국 지도부 특히 마오쩌둥(毛澤東)의 ‘군사적 낭만주의’로 인해 신생국임에도 불구하고 개입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함으로써 사회주의진영의 가장 믿을 수 있는 동료임을 과시하자는 의미도 있었다. 한국전쟁은 중국에대한 안보 불안감을 지속시켰고, 당의 이념적 정치적 전통도 군사요소에 의해 지배받는 등의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토론〓미국 중국 러시아의 한국전쟁 개입 이유는 자국의 안보와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3개국의 정책적 판단이 집중검토됐다.
백진현(白珍鉉)서울대교수는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과 미군주둔 결정은 가장 중요한 대한반도 정책으로 오늘날의 한반도의 모습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한국이 자신감을 갖고 북한을 대화의 테이블로 끌어들인 것도 미국의 안보우산을 통한 경제성장 등이 배경이 됐다”고 말했다.
세종연구소 정은숙(鄭銀淑)연구위원은 “한반도 문제는 먼저 남북한이 논의할 사항이고 이원칙은 러시아 등 주변국들이 존중해야 할 사안이라는 점에서 다자간 협의체를 만드는 것은 적합지 않다”고 강조했다.
이태환(李泰桓)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여한 배경을 마오쩌둥의 군사적 낭만주의라는 접근만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며 “중국 지도부가 국내적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측면 등에서 한국전쟁 참여를 결정했다는 점을 간과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황유성기자>yshwang@donga.com
[제3회의]한반도 평화구축
▽한반도의 분단, 전쟁과 주변국의 세력균형정책(김계동 국가정보대대학원교수)〓45년 분할점령부터 53년 휴전협정까지를 보면 중심부에 강대국의 세력균형 정책이 자리잡고 있다. 40년대 초반 미국은 중국과 소련의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영향력 행사를 막기 위해 신탁통치안 등을 수립했다. 이어 45년 8월 분할점령을 함으로써 역사적 지리적으로 중국과 소련의 영향권에 있던 한반도에 미국의 세력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했다.
50년 북한-소련-중국의 한반도 독점지배 의도는 미국이 주도한 서방동맹에 의해 봉쇄됐다. 미국과 유엔군은 다시 서방 주도에 의한 한반도 통일을 시도했다. 그러자 소련의 지원을 받은 중국이 개입해 이를 저지했다. 결국 휴전협정 체결로 한반도는 재분단됐고 45년과 같은 형태의 세력균형이 이뤄졌다.
최근 남북관계 개선은 한반도와 동북아의 역학구조를 변화시킬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냉전시기에는 한반도 세력균형이 주변국 주도로 이뤄졌다. 앞으로는 남북한이 주도하는 세력균형체제가 이뤄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은 갈등과 대립을 화해와 협력으로 전환시켰다는 민족사적 의미 이외에 국제적 시각에서 의존적 편승적 대외관계를 자립적 주도적 대외관계로 탈바꿈시켰다는 의미가 있다.
▽‘한국전쟁이후 체제’와 한국민주주의, 그리고 통일문제(박명림·朴明林 미국 하버드대 하버드-옌칭연구소 협동연구학자)〓한국의 전후체제는 세계, 남북관계, 내부수준에서 각각 냉전체제, 적대, 권위주의의 3요소로 특징지을 수 있다. 냉전해체 이후 현재까지는 전후체제의 이완기라 할 수 있다. 통일국가 수립은 전후체제의 해소, 즉 탈(脫)전후체제의 건설과정이 될 것이다.
먼저 전후체제의 극복을 조급하게 바로 통일체제, 통일국가로 연결시키기보다는 상당기간의 ‘통일상태’를 설정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통일상태는 상호체제 인정과 평화를 전제로, 정치권력의 공존 연합을 이룬 상태에서 경제사회 교류와 협력의 증가로 이 분야에서 높은 수준의 통합과 의존을 이룬 상태를 말한다. 전후체제와 통일체제의 중간단계다.
남북한 사회경제체제의 이질성과 남북 경제력의 격차를 고려, 시장경제에 기초하되 자유방임적 요소를 제한해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또 남북한이 인구와 국력에서 압도적 불균형 상태에 있음을 고려할 때 자유민주주의 원리인 다수결 원칙에 의한 통일보다는 약자에 대한 배려를 통해 통합과 통일을 추구하는 합의모델, 또는 협의주의 모델에 의한 통일을 고려해야 한다.
▽한국전쟁 해소와 북한 사회주의의 전시체제적 성격(서동만·徐東晩 외교안보연구원 교수)〓한국전쟁의 해소와 관련해 북한체제 변화에서 중요한 과제는 전시체제적 요소를 제거해 평시체제로 되돌리는 일이다. 한국전쟁과 사회주의 개조과정, 냉전시기를 거치면서 북한체제에는 군사적 요소와 ‘수령일인지배’라는 인적통치 요소가 깊이 침투해 있다.
북한체제가 직면한 과제를 설정할 때 참고가 되는 경험은 한국전쟁 발발 이전의 ‘인민민주주의 단계’라 할 수 있다. 인민민주주의단계는 ‘당-국가체제’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복수소유권이 인정되고 시장적 요소가 활용되고 있었다. 형식적이나마 정치적 다원성이 부분적으로 용인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닌 인민주권의 원리가 이념적 정통성의 근간을 이뤘다.
이 점에서 중국의 개혁개방노선의 근거가 된 ‘사회주의초급단계론’의 내용이 중국의 인민민주주의에 해당하는 과거의 ‘신민주주의’와 대동소이하다는 사실은 귀중한 비교재료이다.
최근 북한체제의 변화는 ‘전반적 체제 단속 속에서 실용주의의 강화’라는 나름대로 고심의 선택을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과정에서 김정일의 남북정상회담 결단은 변화를 위한 새로운 전략적 선택으로 추측된다.
▽‘남북한, 일본, 그리고 대만:한국전쟁의 주요 행위자들과 부차적 행위자들’(와다 하루키·和田春樹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구소련의 비밀문서를 보면 한국전쟁은 북한의 남침에서 시작됐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승만 전대통령은 북침을 해서라도 한국을 통일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점도 사실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일본과 대만은 혜택을 입었다. 일본은 미국과의 협의를 통해 실제로는 미군의 전진기지로서의 역할과 지원을 함으로써 경제발전의 기틀을 만들었다. 대만의 경우 미국은 공산주의로부터 대만을 방어하기 위해 제7함대를 파견했다. 이는 대만의 존재론적 의미를 다시 확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한국전쟁은 남북한뿐만 아니라 주변 대부분의 국가들이 어떤 형식으로든 참가한 동북아의 전쟁이다. 이를 통해 성립된 국가관계는 냉전이 종식될 때까지 유지됐다. 이 지역의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을 위해서는 한국전쟁으로부터 파생된 문제들을 정리해야 한다. 남북은 이를 위해 서로를 직시하면서 분단의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를 위한 대화를 해야 한다. 바로 이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인 대화가 시작된 것은 다행이다.
▽토론〓“분단과 대결이 반세기 동안 지배해온 한반도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대전환의 기회를 맞고 있으며 한국전쟁 문제를 올바로 해결하고 향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한반도문제를 올바로 해결하는 것”이라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남궁곤(南宮坤)21세기평화연구소 상임연구위원은 “한국전쟁을 세력균형이라는 국제정치의 고전적 이론을 통해 분석하는 것은 전쟁참가자들이 합리적 행위자로서 국가이익을 극대화한다는 측면을 짚어보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통일국가의 모색과 관련, 임혁백(任爀伯)고려대교수는 “21세기 통일전략은 통일을 인위적으로 추구하기보다는 눈높이를 낮춰 접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평화구축을 통해 사람들이 자유롭게 여행하고 투자할 수 있는 상황이 사실상의 통일상태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왕건(王建)이 고려를 세운 것과 마찬가지로 다원주의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통일한국의 새로운 모델”이라는 주장도 제기했다.
권만학(權萬學)경희대교수는 “북한이 개혁개방으로 나가려면 전시체제의 해소가 중요하다”며 “북한의 위협요인이 사라진다면 남북이 민족정통성을 찾기 위한 경쟁이라는 방향으로 냉전의 흐름이 변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명섭(金明燮)한신대교수는 “한반도가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면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동아시아에서 한국전쟁의 수혜자였던 일본과 대만도 적극적으로 평화구축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일본이 한국전쟁에 실질적으로 참여했다는 와다 하루키 교수의 논문에 대해 “북한이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과정에 일본의 한국전쟁 개입을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계기를 제공할 것으로도 보인다”고 지적했다.
<정리〓황유성·김영식기자>ys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