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만 칼럼]귀족 경영 닷컴 경계해야

  • 입력 2000년 3월 19일 19시 59분


미국의 투자자는 그래도 다른 나라 투자자에 비하면 점잖고 양식 있는 편인 것 같다. 미국의 투자자는 증권시장에서 첨단기술주가 다소 과대평가돼 있다고 믿고 전통적인 블루칩으로 돌아서고 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뒤늦게 첨단기술주에 대한 투자 붐이 일고 있다.

지난주 거의 모든 영국 언론매체를 도배질한 것은 라스트미니트닷컴(Lastminute.com)의 상장소식이다. 미국의 프라이스라인닷컴(Priceline.com·항공권 경매사이트)의 영국판인 이 회사는 적자인데다 지난해 4·4분기 매출이 65만달러밖에 안된다. 하지만 상장을 통해 10억 달러를 조달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 언론매체는 특히 이 회사를 창업한 마사 레인 폭스(27·여)에 관심을 쏟았다. 그녀는 귀족 집안의 후손이다. 지난달 상장 첫날 주가가 300배 오른 옥시전(Oxygen)사도 마찬가지.

다른 사람들의 사업 아이디어를 키워주는 ‘인큐베이터(incubator)’를 자처하고 있는 이 회사의 사업전망은 그렇게 좋아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 회사가 인기를 끈 것은 바로 창업자들 때문. 그들 중에는 엘리자베스 머독(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의 딸)과 매튜 프로이트(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증손자)가 들어 있다.

영국의 경제전문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조차 분통을 떠뜨렸다.

“계급과 전통적인 네트워크를 타파함으로써 평등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됐던 인터넷이 기존의, 또는 새로운 유산계급을 위한 발판이 되고 있다. 인터넷으로 성공한 사람의 명단은 마치 귀족 명단과 흡사하다.”

영국만이 아니다. 홍콩에서는 톰닷컴(Tom.com)의 주식을 사려는 군중을 통제하기 위해 경찰이 출동했다. 이 회사는 홍콩의 유력재벌 리자청이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인기를 끌었다. 홍콩에서 큰 전화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그의 아들 리처드 리가 만든 인터넷 회사 퍼시픽 센추리 사이버워크스도 마찬가지.

물론 미국도 계급 없는 능력위주의 사회라고는 할 수 없다. 차기 대통령이 되려는 이들도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아니다. 재계에도 앵글로색슨, 신교도 출신의 백인(WASP)이 월등하게 많다. 하지만 미국의 투자자는 그럴듯한 사업계획도 없이 단지 창업자가 유수한 가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돈을 쏟아붓지는 않는다.

미국의 신경제는 새로운 사람들이 주도하고 있다. 대부분 이민자이거나 이민자의 아들딸이다. 아시아계가 창업한 회사가 실리콘밸리의 창업 회사 25%를 차지한다. 미국의 테크놀로지 스타들은 아이디어를 팔지, 인맥이나 배경을 팔지는 않는다.

<정리〓홍은택기자> euntac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