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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7월 18일 19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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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마흔살이던 68년2월20일 채권자의 부탁으로 빚독촉을 하던 일본 폭력배 2명을 시즈오카(靜岡)현 시미즈(淸水)시의 클럽 밍크스에서 라이플총으로 사살했다. 폭력배가 “‘조센진’, 더러운 돼지새끼”라고 하자 그는 격분했다.
김씨는 재일한국인을 노골적으로 멸시했던 경찰관도 죽이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실탄과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차량을 이용해 도주했다. 시즈오카현 혼카와네(本川根)의 한 온천여관에 들어간 그는 투숙객 13명을 붙잡고 88시간 동안 인질극을 벌이다 체포됐다. 72년 1심, 74년 2심을 거쳐 75년 최고재판소(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김씨는 인질극을 벌이면서 재일동포에 대한 일본경찰관의 차별적 태도를 성토하고 경찰고위층의 사죄와 해당 경찰관의 파면을 요구했다. 그런 일이 없다고 우기던 경찰관은 결국 TV에 출연해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했다.
당시 일본언론은 김씨를 ‘극악무도한 흉악범’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인질극 과정에서 그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였다. 풀려난 인질들은 “김씨가 인간적으로 대해주었으며 거의 공포를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여관 여주인은 지금도 김씨의 시계를 보관하고 있다.
사건 이전에도 김씨의 삶은 기구했다. 본명은 권희로. 두살 때 아버지를 잃고 다섯살 때 어머니 박득숙(朴得淑·98년11월 작고)씨가 재혼하면서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라 김희로가 됐다. 의붓아버지의 구박으로 열세살 때 가출했다. 일본사회의 천대 속에서 형무소를 들락거리며 청춘을 보냈다. 결혼에도, 사업에도 잇따라 실패했다.
80년대 후반 박삼중(朴三中)스님과 재일동포 실업가 조만길(趙萬吉)씨 등을 중심으로 김씨 가석방 운동이 시작됐다. 김씨가 구마모토(熊本)형무소에서 모범적인 수형생활을 해왔고 “아들이 받을 벌을 내가 대신 받게 해달라”며 눈물로 지새던 노모 박씨도 영향을 미쳤다. 박스님 등은 90년9월 평민당총재였던 김대중(金大中)대통령, 통일민주당총재였던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 등 한국인 10만명이 서명한 석방탄원서를 일본정부에 제출했다. 그의 삶을 그린 ‘김의 전쟁’이라는 영화가 한일 양국에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신원보증인이 없고 폭력배의 보복우려가 있다”는 등의 이유로 석방하지 않았다. 일본정부는 재일동포 차별문제가 부각될 것을 의식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쿄〓권순활특파원〉sh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