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권순익-대만 호칸 2인 ‘음유시공’展… 대만 에일리언 아트센터
권순익, 물감 겹칠하며 내면 향해… 호칸, 불필요한 요소 없애 본질로
작품들 비슷해 보여도 정반대 방식… 독립적으로 전개되다 ‘호응-교차’
대형회화-설치 미술 등 72점 선봬
권순익 작가가 아프리카 여행 도중 카메라를 잃어버린 뒤 ‘현재’에 집중한 경험을 담은 ‘틈’ 연작(위 사진)과 호칸 작가의 2019년 작품 ‘추상 2019-044’이 대만 가오슝 에일리언 아트센터에서 함께 전시되고 있다. 에일리언 아트센터 제공
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에 영감을 준 것으로 유명한 홍콩 문학가 류이창(1918∼2018)의 소설 ‘테트-베슈(對倒·교차점)’. 소설은 197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이주한 중년 남성과 10대 소녀의 이야기를 나란히 보여준다. 제목 ‘테트-베슈’는 우표 수집가들이 쓰는 말로, 우표 두 장이 위아래 반대로 붙어 있는 ‘쌍둥이 우표’를 가리킨다.
지난달 23일 대만 가오슝 에일리언 아트센터에서 개막한 전시 ‘음유시공(吟遊時空·The Bards of Time and Space)’은 마치 이런 쌍둥이 우표와도 같았다. 중국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50년을 살다 대만으로 돌아온 작가 호칸(霍剛·훠강·93)과 한국에서 태어나 남미와 유럽에서 활동한 작가 권순익(66)을 교차 구성했기 때문이다. 미술관 측은 “‘테트-베슈’에서 두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전개되며 서로 호응하는 구조에서 힌트를 얻어 전시를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권순익(왼쪽), 호칸.실제로 전시장에 들어서면 국적도 세대도 다른 두 작가의 작품이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가까이서 질감, 붓 터치를 눈여겨볼수록 둘의 접근 방식이 완전히 다름을 알게 된다. 권 작가는 캔버스 위에 물감을 겹겹이 쌓는 과정을 무수히 반복해 두껍게 쌓아 올린다면, 호 작가는 순간 떠오르는 형태와 색, 선을 그리며 즉흥적으로 리듬을 만든다.
미술관은 이를 ‘더하기’와 ‘빼기’로 비유했다. 호 작가는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해 본질로 돌아가며, 권 작가는 계속해서 더하면서 내면으로 다가간다는 설명이다.
호 작가는 중국 난징에서 태어나 17세에 대만으로 이주한 뒤, 서구 추상화를 보고 자극을 받아 1964년 밀라노로 이주했다. 권 작가는 급속한 현대화와 산업화를 겪은 세대로, 특히 광산 지역인 경북 문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 ‘흑연’을 자주 사용한다. 이런 두 작가가 가오슝에서 만난 건 ‘현대 아시아 추상’을 함께 짚어 보자는 의도가 담겼다.
미술관 디렉터인 야만 샤오는 “유럽의 초기 추상은 디자인적인 요소가 더 강하게 느껴지는 데 반해 두 아시아 작가의 추상 작품은 산해경(山海經)을 읽는 느낌을 준다”고 했다.
기획자의 의도대로 작품들은 서로 호응하거나 차이점을 드러내며 다양한 모습을 드러낸다. 1955년부터 현재까지 약 70년에 이르는 과정에서 나온 두 작가의 작품 72점이 전시됐다. 호칸의 과감한 선이 돋보이는 대형 회화 작품, 권 작가가 기와에서 형태를 가져와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지는 형태로 만든 설치 작품 등을 만날 수 있다. 내년 11월 1일까지.
“亞 추상화, 서구 모방 아닌 우리만의 철학 담아”
‘에일리언 센터’ 야만 샤오 디렉터 “전시 계기, 韓과 교류 이어가고파”
“아시아의 추상화가들이 서구 스타일을 단순히 모방한 게 아니라 우리만의 철학으로 독자적인 언어를 창조한 역사라는 것을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대만 가오슝에 있는 에일리언 아트센터 디렉터인 야만 샤오(사진)는 센터 개관 7주년을 맞아 개최한 이번 전시의 기획 의도를 이렇게 설명했다.
대만 남부 제2도시이자 무역항인 가오슝에 2018년 문을 연 에일리언 아트센터는 개관 전에는 방치된 건물이었다. 하지만 콘크리트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자연이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해당 건물의 원래 이름은 ‘킨마 호스텔’. ‘킨마’는 금문도와 마조도를 가리키는 말로, 대만군이 머물렀던 군사 숙소였다고 한다. 1967년 만들어져 1988년까지 군인 숙소였다가, 2012년까진 철도 공병 사령부로 쓰였다. 이후 비어 있는 상태로 점점 폐허가 되어 갔다.
샤오 디렉터는 “미술관으로 만들어 보라는 제안을 받고 고민 끝에 수락했다”며 “설계안을 15번이나 바꾸면서 2년여의 리모델링 과정 끝에 지금의 공간이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미술관 이름으로는 ‘낯선 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에서 ‘에일리언(Alien·외계인, 이방인)’을 붙였다. 20세기 이후 근현대 미술을 집중 조명하는데, 미국 작가인 제임스 터렐의 ‘코린토스 터널’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음유시공’전과 일본 작가의 도예·회화전도 열린다.
샤오 디렉터는 “휴대전화 화면으로는 볼 수 없는 예술의 여러 가지 감각을 직접 와서 경험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있다”며 “이번 전시를 계기로 (한국 등과) 국제적인 교류를 이어가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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