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미술관 ‘비밀의 정원’이 열렸다…이우환과 정영선의 ‘무위(無爲)’[김선미의 시크릿가든]

  • 동아일보

4일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 내 옛돌정원. 정원 내 이우환의 ‘관계항-만남’ 작품에 단풍이 비치고 있다. 용인=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4일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 내 옛돌정원. 정원 내 이우환의 ‘관계항-만남’ 작품에 단풍이 비치고 있다. 용인=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가는 세월 붙잡을 수 없는 게 유독 아쉬운 계절이다. 단풍이 절정인 지금, 오랫동안 닫혀 있다가 드디어 열린 ‘비밀의 정원’이 있다. 경기 용인시 처인구 호암미술관에 이달 4일 문을 연 ‘옛돌정원’이다.

호암미술관은 잔잔한 호수를 향해 있다. 에버랜드와 호암미술관을 조성할 때 만들어진 인공 호수로, 넓이가 약 3만6000평이라 ‘삼만육천지’로 불린다. 삼성 창업주 고(故) 이병철 회장의 호를 따 ‘호암호’로도 불린다. 매표소에서 이 호수를 따라 걸으면 주차장이 나오는데 안쪽은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호암미술관의 전통정원 ‘희원’처럼 일찍이 만들어 두고도 공개하지 않던 ‘비밀의 정원’. 그곳이 마침내 열렸다.

옛돌정원. 용인=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옛돌정원. 용인=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계기는 세계적 작가 이우환(89)의 제안이었다. 그는 호암미술관의 유려한 자연을 배경으로 신작을 선보이고 싶다는 뜻을 미술관 측에 전했다. 이에 홍라희 리움미술관 명예관장은 “많은 이들이 언제든지 (이우환) 선생님의 작품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을 뜻깊게 생각한다”며 정원 개방을 결정했다.

‘관계항-만남’. 용인=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관계항-만남’. 용인=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그렇게 열린 옛돌정원에는 이우환의 ‘관계항(關係項)’ 시리즈 신작 세 점이 설치됐다. 동선상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건 지름 5m의 스테인리스 스틸 링 작품인 ‘관계항-만남’이다. 그런데 아직 미완성이다. 작가는 문명과 자연의 만남을 구현할 두 개의 돌을 여전히 찾고 있다고 한다. 어떤 돌이 놓일까. 사람 간의 관계, 사람과 사물의 관계는 얼마나 많은 인연과 우연의 결과일까. 이 정원과 작품의 만남이 그러했듯이….

정원은 조경가 정영선(84)이 맡았다. 그는 호암미술관 희원도 조성한 한국을 대표하는 1세대 조경가다. 옛돌정원이 자리 잡은 지형은 호수 건너편 루이즈 부르주아의 ‘거미’ 조각이 내려다보이는 완만한 구릉지. 그의 조경 철학인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음)’를 펼치기에 제격인 장소다.

옛돌정원. 용인=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옛돌정원. 용인=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정원의 억새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노랗게 잎이 물든 생강나무와 히어리, 빨간 열매를 매단 가막살나무와 쑥부쟁이는 가을의 농익은 색감을 전했다.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관계항-만남’의 철제 링이 단풍을 반사해 비추고 있었다. 그 순간, ‘내가 걷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와 함께 걷는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것이 노자가 말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이 아닐까. 억지로 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하게 두는 것.

옛돌정원. 용인=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옛돌정원. 용인=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옛돌정원. 용인=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옛돌정원. 용인=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이우환은 “버리고 비우면 보다 큰 무한이 열린다”고 했다. 그의 말은 노자의 ‘도덕경’ 제 48장을 떠올리게 한다. ‘배움을 행하면 날마다 보태지고, 도를 행하면 날마다 덜어진다. 덜고 또 덜어내면 무위의 지경에 이르는구나. 무위를 행하면 되지 않는 일이 없다. 천하를 차지하는 것은 항상 일거리를 없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거리를 만들면 천하를 차지할 수가 없다.’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다가 일본 도쿄 니혼대에서 철학을 공부한 이우환은 마르틴 하이데거와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 니시다 기타로의 장소론 등에 심취했다. 1960년대에는 ‘모노하’(物派) 운동을 주도하며 ‘사물을 만들지 않고 존재하게 둔다’는 태도를 견지해왔다.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관계와 여백 속에서 세계의 질서를 드러내려는 시도였다. 그의 대표작 ‘관계항’은 ‘존재는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는 사유에서 출발한다. 돌과 철, 빛과 바람, 관람자까지 모두 하나의 관계항이 된다.

이우환의 철은 하늘을 비추고, 정영선의 억새는 바람을 드러낸다. 둘의 관계는 ‘무위’ 즉, ‘하지 않음’에서 만난다. 정영선의 ‘검이불루 화이불치’는 자연의 리듬을 존중하고 억지로 꾸미지 않는 데 있다. 이우환이 비움을 통해 관계성을 추구하는 것과 닮았다.

더 걷자 ‘관계항-하늘길’이 나타났다. 청명한 가을 하늘을 비추는 20m 길이의 직사각형 스테인리스 스틸 판 위에 서니 마치 하늘을 걷는 기분이었다. 마지막 작품 ‘관계항-튕김’은 휘어진 철판과 두 개의 돌이 마주 선 형태. 낙엽이 내려앉은 바닥의 하얀 자갈을 밟아보니 걸음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흰 눈밭의 정적 속 에너지가 이런 걸까.

‘관계항-하늘길’. 용인=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관계항-하늘길’. 용인=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관계항-튕김’. 용인=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관계항-튕김’. 용인=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길 건너 전통정원 ‘희원’에는 이우환의 또 다른 신작 ‘실렌티움(Silentium·묵시암)’이 설치됐다. 실렌티움은 라틴어로 침묵, 묵시암은 ‘고요함 속에 본다’는 뜻이다. 빛과 어둠, 실내와 실외, 그려진 것과 그려지지 않은 것이 만난다. “침묵 속에 머물며 세상 전체가 관계와 만남, 서로의 울림과 호흡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 작가가 관람객에게 바라는 바다.

호암미술관 희원에 설치된 이우환의 ‘실렌티움’ 야외 설치작품. 용인=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호암미술관 희원에 설치된 이우환의 ‘실렌티움’ 야외 설치작품. 용인=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옛돌정원에서 사람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걷다가 호수를 향해 앉아 고요하게 같은 방향을 응시했다.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종종 무엇을 위해 어디를 향해 그토록 서두르는 걸까. 옛돌정원에는 억지로 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하게 두는 걸음들이 있었다. 걷고, 멈추고, 다시 흘러갔다. 이우환의 ‘비움’이 정영선의 ‘절제’ 위에서 빛을 얻고 있었다. 정원은 예술과 조경이 서로를 허락하는 무위(無爲)의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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