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심영섭]‘왕의 남자’가 일으킨 동성애신드롬

  • 입력 2006년 2월 8일 03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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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왕의 남자’의 흥행 수치가 관객 1000만 명의 고지를 향해 가파르게 가고 있는 즈음,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동성애에 대한 소재가 문화계에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곱상한 외모의 꽃미남 배우의 몸값이 뛰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브로크백 마운틴’ ‘메종 드 히미코’ ‘타임 투 리브’ 같은 동성애 소재 영화가 개봉되어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특히 동성애 소재가 흥행과 연관되는 점만큼은 뚜렷한 문화적 이변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과거에 ‘내일로 흐르는 강’이나 ‘로드 무비’ 등 국내에서도 동성애를 다룬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프리실라’ ‘소년은 울지 않는다’ 등등 국내외의 동성애를 다룬 영화들은 너나없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소수자로서의 동성애 문제를 강하게 내세우는 경향이 있었다. 즉 ‘그들은 고통 받고 있는 다른 사람이고 그들만의 문화를 지니고 있다’라는 것이 이들 영화의 주된 메시지였다.

한 예로 ‘프리실라’나 ‘헤드 윅’ ‘벨벳 골드마인’의 동성애자들은 튀는 의상으로 여장을 하고 짙은 화장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최근 개봉한 외국 영화들과 한국 영화들은 모두 동성애를 개인적인 관점, 즉 그들이 느끼는 내밀한 정서를 따라가면서 이들이 영위하는 일상을 다룬다. 동성애자들에게 성차(性差)란 이데올로기가 아닌 일상과 정서의 색을 입힌다. ‘메종 드 히미코’의 게이들은 다 늙은 노인네로 희희낙락 게임을 하고 텔레비전을 본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카우보이 둘은 다 결혼하고 사회 속에서 섞여 살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다. ‘왕의 남자’나 군대 내 동성애를 다룬 ‘용서받지 못한 자’ 같은 국내 영화도 마찬가지다. 궁궐에서, 스포츠 팀에서, 혹은 군대에서 동성애는 존재해 왔을 것이고 영화는 그런 삶의 조건으로서 동성애를 가감 없이 끄집어낸다.

특히 ‘왕의 남자’는 동성애가 주는 정서적 충격을 사극이라는 장치로 시간적 거리감을 둠으로써 안전하게 관객들에게 다가간 것으로 보인다. 연산과 공길 사이의 성적인 긴장감은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놀이’ 같은 개념으로 희석되어 버리고, 공길과 장생 사이의 성적인 긴장감은 플라토닉 러브로 이상화되어 있다. 웃음과 울음의 울림으로 정치 풍자의 날을 벼리며, ‘왕의 남자’는 동성애자이자 광대들의 삶의 애환에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TV광고와 드라마에도 동성애적 은유가 확산되면서 이제 더는 신기한 구경거리가 아니다. 외국의 경우 동성애자들은 결혼을 할 수 있게 됐고, 가정을 꾸리고 있다. 정신의학계에서도 동성애는 이제 더는 성적 정체성 장애로 다루지 않는다. 문화계에 부는 동성애 소재의 열풍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동성애를 ‘있을 수 있는 삶의 패턴’으로 받아들이면서 벌어지는 문화적 수용 현상의 단초라고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이는 우리 사회에 수면 아래 잠겨 있던 동성애가 양지로 올라오면서 벌어지는 시작일 뿐이다. ‘왕의 남자’는 생동하는 역동성으로 기존 주류라는 개념을 뒤집어 보여 주는 한 방울의 독(약) 같은 전복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그리고 그랬다면 그것을 수용할 관객층도 엷어졌을 것이다).

‘왕의 남자’가 조금 더 도전적이 될 수 있을까. ‘게이 바’라든가 ‘여장 남자’ 같은 문화적 고정관념을 깬 최근의 동성애 소재 영화들. 이제 동성애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을 넘어서 실제 삶과 제도 안에서도 동성애를 수용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가 이들 영화의 열풍 이후에 우리 사회에 던져졌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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