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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5월 6일 18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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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오전 KBS 대하사극 ‘태조 왕건’을 촬영중인 경북 문경새재 용추계곡. 제작진은 이곳에서 궁예의 최후를 찍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였다.
궁예 역의 김영철은 분장을 마치자 그리 덥지 않은데도 손에 땀이 나는 듯 손바닥에 휴지를 숨기고 있었다. 김영철은 “어제만해도 ‘그냥 죽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촬영장에 오니 파란만장했던 궁예의 최후를 온몸으로 느낀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은부 장군역의 박상조는 “문경에서 아침식사를 하는 게 마지막이라고 했더니 식당 아주머니가 별 반찬을 다 내놓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날 첫 촬영은 궁예가 왕건을 맞이하기 전의 독백 장면.
궁예는 왕건의 혁명군에 쫓겨 도망치다가 명성산(鳴聲山·강원 철원군과 경기 포천군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궁예가 목놓아 울었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에 이르러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된다. 산 밑에는 왕건과 혁명군이 기다리고 있다. 궁예는 “왕건 아우에게 올라와 술한잔 하자고 전해라”며 굴곡 많았던 50평생을 돌이켜본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어. 인생이 찰나와 같은 줄 알면서도 왜 그리 욕심을 부렸을꼬. 허허허, 이렇게 덧없이 가는 것을…. 이렇게 가는 것을….”(궁예의 독백)
강일수 PD의 큐 사인이 떨어지자 마자 시계 바늘이 순식간에 1083년전(918년)으로 돌아간다. 조금전까지 촬영을 기다리며 주위에서 졸고 있던 병사역의 배우들이나, 칼로 장난치던 장수들도 눈에 힘을 넣으며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나 곧장 NG. 김영철이 ‘세월’을 ‘인생’이라고 말했기 때문. 제작진 가운데 누군가가 “궁예의 최후를 앞두고 인생이라는 말이 뇌리에 사무친 모양”이라고 주석을 단다.
다시 큐에 이어 NG. 이번에는 폭포의 물소리가 문제였다. 폭포가 말라 ‘시냇물’ 정도였으나 독백을 낮게 읊조리기 때문에 그마저 ‘잡음’이 되고만 것. 결국 마이크를 분리해 궁예의 앞에다 놓는 등 갖은 궁리 끝에 다시 촬영에 들어갔다.
김영철은 독백을 하는 동안 눈물을 글썽거려 ‘역시 타고난 연기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는 “배역에 젖다보니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고 말한다.
이어 왕건과 궁예가 마주하는 장면과 이날의 하이라이트인 궁예의 최후가 촬영됐다.
카메라를 들여다 보던 박성수 FD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진다.
“어이! 저기 현대물(요즘 복장을 한 스탭) 빨리 벗어나. 저쪽 나무 가지 치우고.”
커다란 반석 위에 마주 앉은 궁예와 왕건. 큐 사인 전 긴장한 듯한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슬며시 웃는다.
왕건 역의 최수종은 드라마때처럼 걸쭉한 목소리로 “형님은 시원섭섭하겠구료”라며 농을 던진다. 궁예는 “그렇다마다 아우, 이제는 아우가 드라마를 잘 이끌어가기를 바라오”라고 받는다. 궁예를 뒤에서 베는 역할을 맡은 은부역의 박상조는 “으랏차차”라며 큰 칼을 빼는 ‘연기’를 되풀이한다.
궁예의 최후 장면은 다섯시간 넘게 촬영됐다. 섬세한 감정 표현을 위해 제작진이 공을 들였기 때문.
궁예는 왕건에게 “대 제국을 이루시게”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은부 장군의 칼에 쓰러진다. 동시에 은부 장군은 휘하 장수인 금대의 칼에 죽고 금대도 이어 자결한다. 궁예의 책사였던 종간은 궁예가 철원황궁을 벗어나기 전 자결했고 왕건은 그의 목을 베어 내건다.
이날 녹화장에는 500여명의 관람객이 모여들었다. 현장을 지켜본 김새아양(경남 마산 의신여중 2년)은 “궁예가 막바지에 패악을 저지른 끝에 죽는 것을 보고 왕건이 정치를 잘해줬으면 좋겠다”며 “오늘날 우리 정치도 국민의 불신을 사는데, 여기서 같은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태조 왕건’은 궁예의 최후 이후 왕건과 견훤간의 갈등 구도를 축으로 왕건이 제국을 건설하는 스토리로 전개되며 올해말 184회로 막을 내린다.
■'최후' 찍은 김영철의 소회…"한동안 허탈하겠죠"
궁예 역의 김영철은 4일 오전 자신의 최후 장면을 찍기 앞서 20여명의 취재진과 수많은 관람객을 보자마자 “엄숙함과 처연함이 교차되네. 어제까지 별 생각 없었는데…”라며 카메라 앞에 나섰다.
김영철은 시청률 40% 이상을 기록하며 정상을 달리는 ‘태조 왕건’를 이끌어온 드라마의 ‘일등 공신.’ 그는 궁예를 카리스마가 짙은 권력자이자, 인간적인 번민에 괴로워하는 이중적인 모습으로 그려내 시청자들 사이에서 ‘궁예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궁예를 머나먼 역사의 인물이 아닌, 우리 옆에 사는 인간의 모습으로 드러내려고 노력했다”며 “폭군인 동시에 영웅인 그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후의 촬영에 들어가자마자 1083년전 몰락한 궁예 그대로를 보는 듯 연기혼을 불살랐다. 그의 표정은 삼국 통일과 북벌의 야망을 품었던 ‘큰 얼굴’이었다가 한순간에 인간의 삶이 허무함을 깨닫는 달관의 수도자가 됐다.
김영철은 “궁예역을 위해 깎았던 머리를 다시 기를 것”이라며 “한동안 허탈할 것 같다”고 허허롭게 웃었다. 120회 촬영 중 기억나는 것은 철원성 공략과 ‘내가 서자면 어떻고, 애꾸면 어때’라고 외치는 장면이라고.
그는 영화와 드라마 등에서 캐스팅 제의를 받았으나 아직 결정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문경〓허엽기자>h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