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K철도’ 기술보다 가격 앞세운 출혈 수주 경쟁…더 지체하면 철도 대란 우려, ‘DIP 파이낸싱’이 현실적인 해법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4월 16일 04시 30분


K철도 정상화를 위한 전략적 과제
시장 점유율 40%대 공급사
지난달 기업회생절차 개시 신청… ‘조 단위’ 제작 사업 줄줄이 중단
원가 이하 경쟁 부추긴 발주처… ‘열차 납품 중단’ 부메랑 돌아와

《 2026년 3월 30일 대한민국 철도 업계에 벼락같은 소식이 떨어졌다. 국내 전동차 시장의 점유율 40% 이상을 차지하던 주요 공급사 중 하나인 A사가 수원회생법원에 기업회생절차 개시를 신청한 것이다. 경영 위기의 징후는 오래전부터 수면 아래 쌓여 있었지만 회생 신청이라는 형태로 공식화되자 업계 전체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충격은 곧 현실의 파장으로 이어졌다. 코레일(한국철도공사)과 서울교통공사는 규정에 따라 잇달아 계약 해지를 통보했고 A사가 진행 중이던 조 단위 규모의 전동차 제작 사업이 전면 중단됐다. 공장 문이 닫히고, 조립 라인이 멈추고, 수년간 현장을 지켜온 숙련 인력들이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수습책이 나오기도 전에 오랜 시간 쌓아 올린 현장의 기술력이 먼지처럼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철도 업계와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단순히 ‘한 기업의 경영 실패’로만 보지 않는다. 직접적인 책임은 물론 A사에 있다. 계약 불이행과 자금 운용 부실은 법원과 관련 기관의 엄정한 심판을 통해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수십 년간 반복돼 온 철도차량 입찰 제도의 구조적 결함이 이 위기를 키운 배경이라는 사실 역시 외면할 수 없다. 이번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느냐가 대한민국 철도산업 전체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


시민의 발인 지하철은 멈춰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공급 차질과 제도적 혼선 속에 K철도는 지금 위기의 갈림길에 서 있다. AI 생성 이미지
시민의 발인 지하철은 멈춰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공급 차질과 제도적 혼선 속에 K철도는 지금 위기의 갈림길에 서 있다. AI 생성 이미지

‘최저가 낙찰제’의 명과 암… 경쟁이 만든 역설

한국의 철도차량 시장은 오랫동안 독특한 생태계를 유지해 왔다. 1980∼90년대 기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국내시장에서 3개의 대형 제조사가 최저가 입찰 제도 아래 치열한 수주 경쟁을 벌였다. 가격경쟁력이 수주를 결정하는 구조였고 업체들은 구조적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계약을 따내는 악순환에 빠졌다. 수익성이 무너지자 연구개발과 품질 투자는 자연스럽게 뒷전으로 밀렸다.

IMF 외환위기 이후 1999년을 기점으로 이 구조는 정부 주도의 강제 통합으로 재편됐다. 3개 회사가 하나로 합쳐졌고 그 결과물이 오늘날의 B사다. 국내에 고속철도가 도입되고 산학연이 협력해 독자적인 K철도 기술을 완성해 가던 시기이기도 하다. 단일화된 공급 체계에서 경쟁의 역동성은 줄었지만 기술 축적과 품질 안정 면에서는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독점 체제가 장기화되면서 새로운 문제가 싹텄다. 단일 공급자 의존이 고착되면서 가격 협상력이 약해지고 혁신의 속도도 더뎌진 것이다. 이에 발주처들은 2016년부터 경쟁 시장 체제로 전환을 추진했고 C사와 A사가 전동차 시장에 본격 진입했다. 방향 자체는 옳았다. 문제는 개방의 방식에 있었다.

발주처들이 채택한 ‘기술·가격 분리 동시 입찰 제도’는 표면적으로는 기술과 가격을 함께 평가하는 체계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변별력이 부족한 기술평가를 통과하기만 하면 가장 낮은 가격을 쓴 업체가 계약을 따가는 구조였다. ‘이 업체가 계약을 끝까지 이행할 능력이 있는가’를 따지는 실질적 검증 절차는 처음부터 허술했다. 업체들은 생존을 위해 원가 이하의 가격을 써내야 했고 적자를 감수한 ‘출혈 수주’가 업계의 관행으로 굳어졌다. 이런 관행은 어느 시점에는 폭발할 수밖에 없는 ‘시한폭탄’을 품고 있었다.

무궁화호의 노후화는 승객들에게 직접적인 불편을 주고 있다. 코레일 제공
무궁화호의 노후화는 승객들에게 직접적인 불편을 주고 있다. 코레일 제공

총자본 2000억 원의 회사가 수조 원대 계약을 맡았을 때

철도차량 산업은 계약 단위가 수백억에서 수천억 원에 이른다. 계약 체결부터 납품까지 통상 3년에서 5년이 걸린다. 그 기간 동안 기업은 공장을 돌리고, 수백 명의 인력을 유지하며, 복잡한 부품과 원자재를 조달해야 한다. 운용 자금의 규모가 계약 금액을 훨씬 웃도는 경우가 많다.

총자본 2000억 원 안팎의 중소기업이 수천억 원짜리 계약을 동시에 여러 건 수행한다는 것은 재무적 관점에서 처음부터 위태로운 도전이었다. A사가 선택한 방법은 이른바 ‘선금 돌려막기’였다. 새로 따낸 계약의 선급금을 기존 계약의 운영 자금으로 전용하는 방식이다. 단기적으로는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지만 새 계약을 계속 따내야만 유지되는, 구조적으로 취약한 방식이다. 발주처들이 선금 관리를 강화하고 지급을 통제하기 시작하자 A사의 자금 구조는 버텨낼 여지를 잃었다.

여기에 기술력 부족과 관리 역량의 한계가 겹쳤다. 납기가 지연되면 추가 인력과 비용이 투입되고 이는 다시 자금 부담으로 돌아온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의 글로벌 원자재 가격 급등과 고물가는 원가 이하로 수주한 계약들의 손실을 걷잡을 수 없이 키웠다. 설계 변경, 품질 문제, 지체 상금이 겹치면서 재무구조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A사의 2025년 사업보고서는 이 붕괴의 민낯을 숫자로 보여준다. 자본총계는 마이너스 5156억 원으로 완전 자본잠식 상태다. 누적 결손금 8467억 원, 당기순손실 1924억 원으로 불과 1년 전 62억 원의 흑자를 냈던 회사라고는 믿기 어려운 극적인 추락이다. 매출액은 전년 대비 70.5% 급감한 769억 원에 그쳤고 최근 분기 매출은 3억 원에도 미치지 못했다. 외부감사인 삼일회계법인은 유동부채가 유동자산을 7235억 원 초과하는 상황과 함께 경영진이 감사에 필요한 핵심 자료 제출을 거부한 사실을 들어 ‘감사의견 거절’을 결정했다. 2026년 3월 17일부터 A사의 코스닥 주권 매매거래는 정지됐다.

전문가들은 이 지점에서 다시 입찰 제도의 문제를 짚는다. 계약 이행 능력의 사전 검증이 제대로 이뤄졌다면 이 같은 피해를 막을 수 있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낮은 가격으로 계약을 따내는 능력과 그 계약을 끝까지 이행하는 능력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현행 입찰 제도는 이 둘을 구별하지 못했고 그 대가는 국민 전체가 치르고 있다.

입찰 제도,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A사 사태 이전에도 이 문제점은 반복적으로 제기돼 왔다. 발주처들은 B사의 독점 체제를 깨고 C사와 A사를 시장에 진입시키기 위해 기술평가 기준을 대폭 완화했다. 진입 기준을 낮추는 과정에서 계약 이행 능력 검증도 함께 느슨해진 것이 문제였다. 업계에서 ‘고무줄 평가’라는 말이 오래 회자된 이유다. 발주처가 상황에 따라 평가 기준을 조였다 풀었다를 반복하면서 어느 기준이 진짜인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A사 사태가 불거지자 발주처들은 급격히 반대 방향으로 선회했다. 그런데 강화된 기준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진정한 기술 변별력을 높이는 방향이라기보다 기존 실적 업체만 살아남을 수 있도록 시장을 사실상 닫아버리는 형태에 가깝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편 서울교통공사는 2026년 2월 공개된 6·7호선 신조 전동차 사전 규격을 보면 기존의 2단계 경쟁(최저가 낙찰) 틀을 유지하면서 기술평가 문턱을 대폭 높였다. 납품 지연 감점을 3점에서 5점으로 올리고 등급 간 점수 격차를 2배로 확대했다. 중소기업 신인도 가점도 폐지했다. 공정 지연 시 즉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표준 공정률’ 조항도 새로 도입됐다.

코레일이 ‘가점’으로 1등을 밀어주는 방식이라면 서울교통공사는 ‘감점’으로 하위권을 쳐내는 방식이다. 수단은 다르지만 두 기관의 신호는 하나다. “납기 지연 이력이 있거나 생산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업체는 수주 자체가 불가능하다.”

발주처마다 다른 기준이 적용되면 제작사는 어느 쪽에 맞춰 역량을 키워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더 심각한 것은 기술력은 있지만 납품 실적이 아직 많지 않은 새 업체가 시장에 진입할 기회 자체가 봉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토교통부가 입찰 제도 개선을 위한 컨설팅을 의뢰하며 다각적인 검토에 착수했다는 소식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새 제도가 정착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지금 당장 수습해야 할 현실이 눈앞에 있다.

‘규정 준수’와 ‘국익 극대화’ 사이에서

A사가 회생 신청을 한 이상 발주처들이 계약 규정에 따른 해지를 통보한 것은 행정적으로 가장 명확하고 안전한 선택이다. 책임 소재가 분명하고 절차적 투명성도 높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규정의 준수가 반드시 국익의 극대화로 이어지는가?”

규정은 일반적인 상황을 전제로 설계된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상황은 일반적이지 않다. 수조 원 규모의 국가 철도망 사업이 동시에 여러 건 중단돼 국민의 이동권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비상 상황이다. 이럴 때야말로 규정의 기계적 적용이 아닌 국가적 차원의 정무적 판단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비용부터 살펴보자. A사가 당초 수주한 전동차 계약 단가는 현재 시장가격과 상당한 격차가 있다. 물가 상승과 원자재·인건비를 반영한 현재 시장 단가는 1량당 대략 30억 원대에 이른다. 기존 계약가 대비 총 사업 예산이 2배 이상 늘어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전면 계약 해지 후 신규 발주 시 추가 국고 투입 규모가 1조 원을 훌쩍 넘을 것이라는 전망이 업계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기에 A사가 이미 조달한 원자재·부품과 어느 정도 진행된 공정에 투입된 비용이 계약 해지와 함께 그대로 매몰된다. 선급금 사용처를 둘러싼 의혹까지 포함하면 그 손실의 총합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 모든 비용은 결국 납세자의 몫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이 더 강조하는 것은 비용보다 시간이다. 돈은 추가 예산으로 메울 수 있지만 잃어버린 시간은 돌이킬 방법이 없다.

‘잃어버린 5년’… 멈춰 선 선로와 시민의 불편
계약 해지 후 재입찰 땐 5년 지연
자금 공급해 철도차량 생산 재개
신규 발주 대비해 비용 30% 절감
차량 납기 최소 2년 이상 앞당겨


전동차를 새로 발주한다고 당장 열차가 굴러오는 것이 아니다. 입찰 결의 및 입찰 공고, 입찰, 계약, 기본 설계, 상세 설계, 형식시험 이후 납품까지 아무리 서둘러도 최소 4∼5년이 걸린다. 지금 당장 발주처의 시계가 움직인다고 해도 새 전동차가 선로를 달리려면 2030년대 초반이 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서울지하철 7호선 청라 연장선 6공구 건설 현장. 2027년 말 부분 개통 예정인 청라 연장선은 2026년 2월 28일 기준 누계 실적 공정률 56.30%를 기록했다. 다만 개통에 필요한 전동차 확보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어 청라 주민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인천시 도시철도건설본부 제공
서울지하철 7호선 청라 연장선 6공구 건설 현장. 2027년 말 부분 개통 예정인 청라 연장선은 2026년 2월 28일 기준 누계 실적 공정률 56.30%를 기록했다. 다만 개통에 필요한 전동차 확보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어 청라 주민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인천시 도시철도건설본부 제공
A사와 계약했던 서울지하철 7호선 청라 연장선이 대표적인 사례다. 선로 공사는 2027년 말 부분 개통 예정으로 착착 진행 중이지만 이번 계약 해지로 인해 투입할 전동차가 없는 황당한 상황이 됐다. 2000년대 초반부터 지하철 건설을 둘러싼 논란 속에 혼란을 겪어온 청라선은 지역 주민의 숙원 사업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선로가 거의 완성돼가는데 열차가 없어 승객을 태울 수 없는 사태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수년째 철도 개통을 기다려온 인천 청라국제도시 주민들은 또다시 미뤄지는 상황을 바라봐야 한다. 인천시는 전동차 신규 도입이 최소 5년 이상 미뤄질 것으로 전망한다.

코레일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이미 폐차 시점이 지난 무궁화호 수명 연장을 위해 추가로 예산을 만들어서 억지로 끌어 쓰고 운행 노선을 줄이거나 객차를 떼어내 돌려막는 임시방편을 이어가고 있다. 전동차 투입이 정상화되지 않으면 운행 간격은 늘어나고 열차는 더 혼잡해진다. 노후 차량을 오래 쓸수록 고장 위험도 높아진다. 이 모든 불이익은 매일 지하철과 기차를 이용하는 평범한 시민들이 짊어진다.

철도는 한번 공급이 끊기면 대체 수단이 마땅치 않다. 고유가·고물가로 인해 이동 비용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이미 팍팍한 삶을 사는 서민들에게 대중교통 불편까지 더해지는 셈이다. 노후 열차 사용이 길어질수록 대형 사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단이 미뤄지는 시간만큼 안전 골든타임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코레일은 노후된 무궁화호 열차를 대체하기 위해 신형 열차인 ITX-마음 도입을 추진했지만 A사의 납품 지연과 계약 해지, 회생 절차 사태와 맞물려 운행 확대에 제동이 걸렸다. 그 여파는 국민의 이동권과 철도 서비스 공백 우려로 이어지고 있다. A사가 제작해 일부 납품한 ITX-마음(사진)은 개통 3주 만에 차량 고장으로 지연됐으며 운행 중 잦은 고장으로 계획된 운행 선로 투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코레일 제공
코레일은 노후된 무궁화호 열차를 대체하기 위해 신형 열차인 ITX-마음 도입을 추진했지만 A사의 납품 지연과 계약 해지, 회생 절차 사태와 맞물려 운행 확대에 제동이 걸렸다. 그 여파는 국민의 이동권과 철도 서비스 공백 우려로 이어지고 있다. A사가 제작해 일부 납품한 ITX-마음(사진)은 개통 3주 만에 차량 고장으로 지연됐으며 운행 중 잦은 고장으로 계획된 운행 선로 투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코레일 제공


제3의 길, 법원 절차를 통한 전략적 정상화


철도 업계와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시나리오는 크게 세 가지다. 계약 해지 후 재입찰, 보증기관인 엔지니어링공제조합 주도의 수습, 회생법원의 절차를 활용한 ‘전략적 사업 승계’다.

재입찰은 절차적 투명성이 가장 높다. 그러나 재입찰 발의부터 계약 체결까지 최소 1년 이상, 거기서 납품까지 다시 3.5∼4년이 걸린다. 노후 전동차 교체 시기가 5년 이상 밀리는 치명적인 대가가 따른다.

보증기관 주도 방식은 이론적으로 계약의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금융기관인 보증기관이 고도의 기술이 집약된 철도차량을 직접 관리하고 완성하는 데는 전문성의 한계가 있다. A사의 부실 규모를 감안할 때 보증기관이 감당해야 할 자금(8000억 원 이상 추정)이 보증보험 제도 전반의 안정성을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전문가들이 가장 현실적인 해법으로 주목하는 것은 세 번째, 법원의 회생 절차 내에서 전략적 사업 승계다. A사가 이미 법원에 회생 신청을 한 이상 법원이라는 공신력 있는 제도적 틀 안에서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사업 정상화를 모색하자는 것이다. 법원의 엄격한 감독 아래 진행되는 만큼 특혜 시비와 불투명한 처리에 대한 우려도 최소화할 수 있다.

구체적인 그림은 이렇다. 엔지니어링공제조합이 DIP 파이낸싱(기업회생 절차 중 신규 운영 자금 지원) 방식으로 생산 재개 자금을 공급한다. 동시에 법의 절차에 따라 적절한 철도차량 제작회사가 중단된 사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다.

법원의 절차가 공공성과 투명성을 보장한다면 전문 기업의 실행력이 그 빈자리를 채우는 구조다. 발주처 입장에서도 역량이 확인된 주체가 현장을 직접 책임진다는 점에서 재입찰이나 보증기관 주도 방식과는 차별화된 신뢰를 제공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방식의 핵심 장점은 이미 진행된 공정과 확보된 원자재를 그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신규 발주 대비 약 30% 이상의 비용 절감 효과가 기대된다. 재입찰 방식의 예상 단가가 1량당 30억 원 수준인 데 비해 법원 주도 방식은 EMU-150(간선형 전기동차) 기준 1량당 20억 원 이하 수준에서 마무리가 가능하다. 서울교통공사 5·8호선 또한 비슷하다. 수천억 원의 국고를 절감할 수 있는 것이다. 납기 역시 신규 발주 대비 최소 2년 이상 앞당길 수 있다. 매일 수백만 명이 이용하는 대중교통의 안전 수준이 그만큼 빨리 높아진다는 뜻이다.

범정부 협의체로 상생의 지혜를 모을 때

법원 주도 방식이 만능 해법은 아니다. 발주처 입장에서 기존의 계약 해지 결정을 번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행정적 일관성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이 있고 결정을 뒤집을 명분과 대안이 충분히 확보돼야 한다. 전문가들이 제안하는 현실적인 출구가 바로 범정부 협의체다.

관련 정부 부처, 발주 당사자인 코레일과 서울교통공사, 보증 업무를 맡은 엔지니어링공제조합이 함께 테이블에 앉는 구조다. 각 기관의 권한과 전문성을 결합하면 단일 기관으로는 풀기 어려운 복잡한 문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런 협의체를 통해 법원 주도 방식이 공식 논의되고 합의된다면 발주처들도 기존 입장에서 유연하게 선회할 수 있는 제도적 근거가 생긴다.

보증기관의 안정성 문제도 이 틀 안에서 다뤄야 한다. A사 계약이 전면 해지돼 보증 사고가 발생하면 엔지니어링공제조합이 부담해야 할 금액은 8000억 원을 넘는다. 이 수준의 보증 사고는 보증보험 제도 전반의 신뢰성을 흔들 수 있다. 법원 주도 방식으로 사업 연속성을 유지하면 이 리스크를 관리 가능한 범위 안에 둘 수 있다. 결국 이번 사태의 해결은 어느 한 기관이 독자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정의 범위를 이미 벗어났다. 지금은 발주처들의 독자적 결단을 넘어 정부의 전략적 의지가 개입해야 할 시점이다.

골든타임, 지금이 바로 그 시간이다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강조하는 말이 있다. ‘골든타임’이다. 결정적인 조치가 이뤄져야 하는 시간대를 뜻하는 이 표현은 그 시간이 지나면 회복이 훨씬 어려워지거나 불가능해진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A사 공장의 숙련 인력이 뿔뿔이 흩어지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전동차 제작이라는 특수한 분야에서 수년간 쌓아온 현장 경험은 사람과 함께 사라진다. 한번 흩어진 인력을 다시 모아 팀으로 재편하고 생산 역량을 복원하는 데는 몇 배의 시간과 비용이 든다. 조립 중인 차체가 방치되면 부식과 손상이 진행되고 확보해 둔 부품과 자재도 시간이 갈수록 사용 가능성이 낮아진다. 골든타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소리 없이 흘러가고 있다.

이번 사태는 여러 차원의 실패가 겹친 결과다. 원가 이하 수주를 반복한 A사의 경영 실책, 계약 이행 능력을 검증하지 못한 입찰 제도의 구조적 결함, 이를 감독하고 조정하는 기관들의 역할 공백이 차례로 맞물렸다. 각자의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더 시급한 것은 책임 규명이 아니라 현실적인 수습책이다.

지금 대한민국 철도에 필요한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는 ‘심판’만이 아니라 어떻게 풀 것인가를 결정하는 ‘해법’이다. 법원 절차를 통해 보증기관의 자금력과 검증된 전문 기업의 실행력을 결합하고 정부의 행정적 유연성이 더해진다면 멈춰 선 전동차는 다시 선로 위를 달릴 수 있다.

대한민국 철도는 매일 수백만 명의 시민이 의지하는 국가 기간 교통망이다. 이 기간망을 지키는 것은 어느 한 기관의 행정적 책임을 넘어 국가가 국민에게 져야 하는 본질적인 의무다. 멈춰 선 전동차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것은 법전 속의 조문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공직자들의 전략적 결단과 이해관계자들의 상생 의지다. 골든타임은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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