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숙한 장례식장 같은 임원실 없애자”

  • 동아일보

대기업들 사무실 재배치 실험
임원-일반직원 한방에서 근무… “의사결정 확실히 빨라졌다”

경기 성남시 분당구 판교로 SK플래닛 사옥은 올 3월 말 사무실 안에서 작은 실험을 시작했다. 임원실을 모두 회의실로 바꾼 것. 최고경영자(CEO) 등 최고위 임원 3명만 한 개의 사무실을 함께 쓴다. 실장과 본부장급은 구성원과 마주 보고 앉도록 전진 배치했다. 나머지 임원들은 일반 직원들과 섞여 앉아 일하도록 했다.

처음엔 서로 불편해하고 어색해하던 임원과 직원 모두 두 달여가 지난 지금은 자리 배치 하나가 불러일으킨 엄청난 변화에 놀라고 있다. SK플래닛 관계자는 “확실히 의사 결정이 빨라졌다”며 “이전에는 보고를 하려면 임원실 약속을 잡고, 시간에 맞춰 찾아가서 인사한 뒤 보고를 해야 했는데 그런 불필요한 과정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전화 통화를 하다가도 바로 옆에 임원이 있으니 의견을 물어 곧바로 회신할 수 있는 ‘기적’이 생겼다고 이 회사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와 컨설팅업체 매킨지가 국내 100개 기업 임직원 4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기업문화 종합진단 보고서’에서 한국 기업 임원실은 ‘마치 엄숙한 장례식장 같다’고 묘사돼 있다. ‘와이(Why)’나 ‘노(No)’는 꺼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다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비판이다.

임원실이라는 공간 자체가 주는 부담감을 없애고 진정한 혁신이 가능한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해 최근 국내 대기업들 중에도 근무 공간에 대대적 변화를 주는 곳이 늘고 있다. 혁신은 일하는 환경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취지다.

SK그룹뿐 아니라 삼성그룹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지시로 미국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삼성전자 북미법인을 시작으로 임원실을 없애는 실험을 시작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지난해 말 미국 새너제이에 완공된 부품(DS)부문 미주총괄 빌딩은 아예 설계 때부터 임원과 직원 구분 없이 자리를 배치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서울 영등포구 의사당대로 현대카드 본사는 임원실과 회의실이 모두 26.4m²(약 8평)로 동일한 크기다. 여느 기업처럼 임원실 안에 소파 등 별도 가구도 두지 않는다. 현대카드 관계자는 “언제든지 임원실을 회의실로, 회의실을 임원실로 바꿀 수 있도록 하려는 취지”라며 “인사 이동 때 사무 가구를 낭비하지 않도록 모든 임원직급이 동일한 사무 가구를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이 회사는 일찍이 임원실 벽을 유리로 만들어 일반 직원들과 원활한 소통이 가능하도록 했다.

사무실 이사를 계기로 근무 환경을 바꾸는 곳도 많다. 특히 정보기술(IT) 기업들이 많이 이사한 경기 성남시 판교신도시나 인천 송도국제도시, 공기업들이 이주하고 있는 지방혁신도시들에서 이런 변화들이 포착되고 있다.

전남 나주 혁신도시로 이사한 한국농어촌공사는 임원실 면적을 이전의 절반으로 줄이는 대신 회의할 수 있는 토론 공간을 9개에서 49개로 약 5배로 늘렸다. 1개 층 전체를 ‘지식 창조 공간’으로 만들어 100명 넘는 인원이 한자리에 모여 토론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미기도 했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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