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폼생폼사 ‘위대한 유산’ 이거 다 어디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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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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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 운동화, 워크맨, 게스 청바지…
■ 세대별 청소년기 패션, 그 열광의 추억

일러스트레이션=김대중 mayseoul@naver.com
일러스트레이션=김대중 mayseoul@naver.com
《 궁녀 차림의 두 여성이 ‘30대 이상 공감 가능’이라는 팻말을 들어 올린다. 그와 함께 개그맨 황현희 씨가 “어디 갔어, 어디 갔어, 이거 다 어디 갔어?”를 외친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KBS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 ‘위대한 유산’이다.황 씨는 “전통 문화를 알려주고자, 세대 간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다”면서 짐짓 심각한 척 이야기를 꺼낸다. 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위대한 유산’은 ‘다마고치’나 ‘배추도사, 무도사’ 등 가까운 과거의 유쾌한 추억들이다. 이 코너는 예전의 소소한 유행이나 놀이들을 통해 보는 이들에게 그와 관련된 추억을 새삼 확인하는 즐거움을 준다. 》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선 ‘노스페이스’ 점퍼가 말 그대로 ‘교복’이 됐다고 한다. 그 가격과 종류에 따라 ‘계급’을 구분한 ‘노스페이스 계급도’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바 있다. 25만 원 상당의 옷은 가장 낮은 계급인 ‘찌질이’가 입는 것이고, ‘대장’은 70만 원대라고 한다. 지나친 열광 현상에 고개를 가로젓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도 한다. 어른들도 누구나 청소년 시절 자신들이 열광했던 ‘아이템’ 하나씩은 있지 않았나.

○ 40대 이상 공감 가능


신발 하나가 너무 갖고 싶었다. 하지만 시장에서 산, W 마크가 크게 크려진 ‘월드컵’ 운동화는 주인 속도 모르고 여전히 새 것인 것처럼 반짝거렸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버린 뒤 팍팍해진 살림살이. 멀쩡한 신발을 놔두고 또 새 운동화를 사 달라는 말은 입에 올릴 수도 없는 분위기였다. 결국 철이 없었기 때문에 행할 수 있었던, 극단적인 방법 하나를 실행에 옮겼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개울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 신고 다니던 운동화 한 짝을 던져 버렸다.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운동화를 사러 갈 때까지는 성공한 듯 보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손에 쥐여진 것은 ‘스펙스’ 운동화 한 켤레였다. ‘프로스펙스’와 같은 회사에서 만들었지만, 하키 채 모양의 곡선 두 개가 그려져 있던 프로스펙스와 달리 ‘짝대기’가 하나인 한 급 낮은 신발이었다. 처음부터 안 될 말이었다. 당시 시장에서 팔던 새 운동화가 5000원이 채 안 됐는데, 친구들 사이에서 제일 쳐주던 ‘나이키’ 운동화는 3만∼4만 원씩 했다. 그림의 떡이었다. 영화 ‘가문의 위기―가문의 영광2’의 정용기 감독(42)이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정 감독은 지금도 가끔 그때 유행했던 신발 모델을 떠올린다. 그래서 신발장에 ‘클래식’이란 이름으로 시판 중인 깔끔한 하얀 나이키 운동화를 모셔두고 있다. 예전에는 천이냐 가죽이냐에 따라서도 운동화의 급이 달라졌다. 당연히 가죽의 급이 더 높았다. 하얀 가죽에 빨간 나이키 로고가 그려져 있던 그 운동화를 누가 신고 오기라도 하는 날에는 친구들이 ‘신고식’을 한다며 신발을 밟아댔다. 그 친구는 신발을 지키기 위해 여기저기 도망 다니기 바빴다. 혹 신발이 더러워지면 가죽 신발을 닦는 왁스를 사다 정성스레 닦기도 했다.

1980년대 초중반 나이키 운동화는 청소년들에게 단순한 신발 이상이었다. 정 감독은 그나마 양호한 편에 속했다. 운동화를 살 수 없는 학생들이 운동화를 훔치거나 신발을 사기 위해 돈을 훔치는 일도 자주 일어났다. 이로 인해 몇몇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등교하는 것을 막기도 했다.

○ 30대 이상 공감 가능

아버지는 아들보다 전자제품에 관심이 많았다. 수입품이 흔치 않던 시기에 혼자 남대문 수입상가에 가 최신 전자제품을 사왔다. 중학교 때 반 친구들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던, ‘오토 리버스’(자동 전환)가 되는 은색 소니 워크맨을 들고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 덕분이었다. 재생, 정지 버튼들 사이로 큼지막하게 적혀 있는 오토 리버스와 ‘SONY’ 네 글자에 아이들이 몰려들어 신기해했다.

친구들은 워크맨이 갖고 싶어 “요즘 이게 아니면 공부가 안 된다. 학습 테이프도 들어야 되고, 전교 1등 하는 애는 수업 시간에 워크맨으로 녹음을 해 반복해서 듣는다”는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워크맨을 손에 쥐면 ‘최신유행곡 모음’을 길거리 리어카나 문방구에서 사서 들었다. 웹툰 ‘입시명문사립정글고등학교’의 김규삼 작가(37)가 기억하는 학창 시절의 한 조각이다.

회사원 김지연 씨(34)는 지금도 ‘게스’ 매장 앞을 지날 때면 웃음이 나온다. 중학교 3학년 때 몇 달 동안 부모님을 졸라 겨우 장만했던 청바지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브랜드를 상징하는 삼각형 로고가 가슴팍을 가득 채운, 절대 정품이 아닐 것 같은 티셔츠를 자랑스럽게 입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학원 가는 길에 만난 친구가 못 보던 청바지를 입고 있으면 엉덩이부터 살펴보곤 했었다. 그래서 간신히 얻어 입은 게스 청바지가 더욱 소중했다. 수학여행 때 입고 갈 생각에 설렜다.

하지만 바지 길이를 줄이기 위해 수선집에 맡겼다 찾아 온 바지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어디서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바지 끝이 복숭아 뼈 위로 확 올라가 있었다. 어머니한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잘라낸 바지 끝을 다시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짧아진 청바지는 수학여행 때 장롱 한구석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 20대 이상 공감 가능

학교 정문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공부가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같은 교복을 입고 모두가 정해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 순간의 공기가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다. 한결같이 어깨에 메고 있는 ‘이스트팩’ 가방은 그래서 더 꼴불견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유행인지는 몰랐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그를 제외한 주변의 모든 친구가 이스트팩 가방을 들고 있었다. 등굣길에 똑같은 가방을 열 개씩 발견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회사원 박준형 씨(28)는 그래서 고등학교 3년 동안 단 한 번도 이스트팩 가방을 메지 않았다. 친구들이 “너도 하나 사”라는 말을 가끔 건네기도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그 가방은 한순간 사라져 버렸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난 뒤로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학생들에게서 더는 이스트팩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얼마 전 친구에게 이스트팩 가방이 여전히 팔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요즘 들어 그 가방을 한번 사서 메 볼까 고민하고 있다.

○ ‘같음’을 추구하는 그들

1980년대 초중반 나이키 운동화가 인기 있었던 이유로는 우선 청소년들의 복장 자유화를 들 수 있다. 1983년 시행된 교복자율화는 청소년들이 복장(사복)을 통해 각자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이와 함께 교복을 통해 가려져 있던 계층의 모습도 드러났다.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소스타인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에서 “의복은 모든 사람에게 첫눈에 금전적인 지위를 나타내 주며, 과시적인 소비의 가장 손쉬운 품목이고, 지불능력의 증거이기 때문에 다른 소비 품목보다도 계층 간의 경쟁적인 상징적 지표가 된다”고 봤다. 즉, 나이키 운동화는 패션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 사이에서 ‘부잣집 아이’의 상징이 된 것이다. 청소년들은 나이키를 신으며 스스로가 상류층에 속한다고 느끼게 됐고, 이런 욕망은 ‘나이스(NICE)’라는 짝퉁까지 나오게 했다.

‘이는 친구들의 옷차림에 민감하고 모방 성향이 강한 청소년층의 심리와 결합하며, 같은 세대 내의 동일성을 나타내는 표시로 자리 잡게 된다. 청소년들은 나이키 운동화를 신으면서 고립된 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심리적 안정감을 얻게 되고, 나이키 운동화는 경제적인 차이가 아닌 유행에 동참하느냐 하지 않느냐라고 하는 집단 문화의 내부자 표시가 됐다.’(한승민, 2004년, 브랜드 소비문화 연구―나이스(Nice)에서 나이키즘(Nikism)까지, 사회조사연구 제19권)

워크맨, 게스 청바지, 이스트팩 가방도 그런 청소년 심리의 표현이었다. 이 물건들은 10대와 20대 초반에게 또래집단의 소속감을 전달해 주었고, 그들만의 언어가 됐다.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청소년들의 인기 아이템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하지만 그 근저에 흐르는 청소년들의 욕망은 언제나 같은 것이었다.

이런 현상이 비단 청소년들에게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동질적인 가치를 지향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것, 비슷하지만 더 비싼 것을 통해서 자신을 남과 차별화하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결국 노스페이스에 열광하는 우리 청소년들은 어른들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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