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마지막 신세계는 캄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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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0월 24일 17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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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게 모르게 가까운 나라, 투기가 아닌 애정으로 관계 키워야

캄보디아는 가장 급속하게 변하고 있는 나라 가운데 하나다. 프놈펜=정호재
캄보디아는 가장 급속하게 변하고 있는 나라 가운데 하나다. 프놈펜=정호재
"제가 태어난 직후 부친은 크메르루즈 군대에 의해 돌아가셨죠. 이후 농사를 짓다가 10년 전 가족과 고향을 떠나 프놈펜 근교로 옮겨와서 뚝뚝을 몰고 있어요."

지난달 말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만난 뚝뚝(오토바이 택시) 운전사 사랏 씨(33)는 담담하게 자신의 이력을 소개했다. 8년째 운행 중인 뚝뚝은 너무 낡아 자주 수리해야 하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다. 매일 아침 6시에 기상해 1시간을 타고 프놈펜 시내로 와서 하루 12시간씩 일하는데 그 덕에 4명의 가족이 먹고 산다고 했다.

운 좋게 외국인을 만나는 날이면 하루 30달러를 벌기도 한다. 하지만 공치는 날도 많아 하루 평균 수입은 10달러 내외다. 이 돈으로 기름 값과 식비 그리고 수리비를 제하고 남은 돈은 6달러 내외. 한 달에 150달러 정도 벌 수 있단다. 힘겨운 생활이지만 그래도 갈수록 벌이가 늘고 있다며 웃었다.

● 한국에 대한 기대감 절정

캄보디아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다. 1인당 국민 소득이 700불도 안 되는 이 나라는 자체 산업 기반이 전무해 생필품조차 인근의 태국과 베트남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한다. "앙코르와트를 팔아서 먹고 산다"는 이웃 국가들의 비아냥거림이 있을 정도다.

이렇게 된 원인은 1970년대와 1980년대 극좌정권인 '크메르루즈'의 실정에 있다. 당시 크메르루즈는 학교를 없애고 화폐제도를 폐지하는 등 원시 공산제로의 회귀를 꿈꿨다. 이와 동시에 식민지 시대 지식인과 정치인 행정가 등을 몰살시켜 한 국가의 지식기반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만행을 저질러 전 세계인들을 경악시켰다.

당시 200만 명 이상이 몰살된 '킬링필드'의 비극으로 널리 알려진 캄보디아지만 이제 그 아픔은 역사의 교훈으로 삼은 지 모래다. 캄보디아는 1998년 본격화된 개혁 개방 정책으로 인도차이나 반도의 떠오르는 신흥 시장으로 각광 받고 있다. 부동산과 건축, 섬유와 봉제 관광 산업을 무기로 최근 5년간 평균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거듭해 왔고 이에 발맞춰 전 세계 유수 기업들이 캄보디아의 풍부한 자원을 노리고 앞 다투어 진입하고 있다.
킬링필드의 상처를 캄보디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프놈펜=정호재
킬링필드의 상처를 캄보디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프놈펜=정호재

그 선두주자가 다름 아닌 한국이다.

"따지고 보면 캄보디아만큼 한국인들이 마음껏 역량을 펼치기 좋은 나라도 드물어요. 여타 동남아 국가들은 이미 유럽자본이나 화교 혹은 일본기업이 선점하고 있잖아요. 캄보디아는 역사적으로 커다란 비극을 경험한 탓인지 한국 같은 중형 국가에 친근함을 느끼더군요. 더구나 기후나 기질도 우리에게 잘 맞아 생활에 불편이 없습니다."(프놈펜 우리회계사무소 고동필 대표)

한국은 캄보디아의 최대 투자국이다. 2006년 이후 매년 10억 달러 이상 투자를 해왔다. 뿐만 아니라 3년 연속 캄보디아를 찾는 최대 방문국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밀려온 한국 섬유업체들에게 한달 평균 임금이 100달러 정도로 저임금 국가인 캄보디아는 베트남과 더불어 제1의 투자처이다.

앙코르와트가 위치한 시엠립이나 수도인 프놈펜에서 만난 캄보디아인들은 아시아인들을 보면 곧장 "한국 사람이냐?"고 묻는다.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어 간판이나 한국 드라마를 만나는 일이 어려운 일은 아니라지만 특히 캄보디아는 한국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까운 나라가 돼 있었다.

한국은 캄보디아의 인재양성, 정보기술(IT), 수자원, 도로 등 인프라 분야에 1억 달러에 가까운 경제개발협력(EDCF) 차관사업을 지원했다. 무상원조 액수도 해마다 늘어나 최근엔 매년 700만달러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통해 지원하는 무상협력사업은 농촌개발, 수자원개발, 보건·의료, IT, 봉제, 한국어 교육 등 전방위에 이른다.

●왕립프놈펜 대학에 생긴 한국어과

프놈펜왕립대학 한국어과 학생들. 프놈펜=정호재
프놈펜왕립대학 한국어과 학생들. 프놈펜=정호재
캄보디아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들이 많아지고 한국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학생들도 급속도로 늘고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어 수업은 KOICA 자원봉사생들로 알음알음 꾸려졌지만 이제는 왕립 프놈펜 대학에 한국어과가 생겼다.

이들의 한국어 실력이 궁금해 2년 가까이 배워야 들어갈 수 있다는 고급반 강좌를 참관했다. 한국어과 학생은 아니고 부전공으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 반이었다.

학생들은 또박또박 정자로 한글 작문 숙제를 제출하고 자신이 방학 때 경험했던 일들을 차분히 한국말로 설명했다. 교사는 틀린 어법을 지적하고 새로운 단어를 소개했다.

한국에서 잘나가는 직장을 그만 두고 이곳에서 2년간 한국어 자원봉사를 펼쳤다는 교사 박니리씨(41)는 "영어와 일본어 공부를 하던 아이들이 점차 한국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며 "한국의 서울대에 해당하는 이 학교 학생들을 한국으로 유학도 보내고 취업도 시키는 것이 소망이다"고 말했다.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캄보디아 학생 라이 소테아니(여·22)는 "학교 수업 외에 집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어 연습을 한다"며 "열과 성의를 다해 가르쳐 주신 선생님께 감사할 따름이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열의와 달리 교재 수준이나 학과의 종합적 발전 계획은 미흡해 보였다. 학생들 대부분이 한국의 모 대학에서 만든 교재를 복사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학생들은 영어나 일본어 공부에도 시간을 빼앗겨 한국어를 익히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한국어는 새로운 기회의 언어이지만 이 왕립대 학생들에게 아직은 불확실한 기회로 비쳐진 탓이다.

●화려했던 투자계획, 주춤한 한국인들

캄보디아에 적극적으로 진출하는 한국기업이 점차 늘고 있다. 프놈펜=정호재
캄보디아에 적극적으로 진출하는 한국기업이 점차 늘고 있다. 프놈펜=정호재
"2008년 전반기가 캄보디아 투자의 절정기였죠."

한국인들을 상대로 캄보디아 부동산 중계를 하는 김 모 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부동산 대박을 맞은 이들이 적지 않다"고 귀띔한다. 순식간에 한국계 법인만 1000여개에 달할 정도로 캄보디아 투자가 공격적으로 이뤄졌다는 얘기다.

한국 기업들이 캄보디아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무엇보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풍부한 지하자원 때문이다. 또 비교적 신흥시장이기 때문에 적은 투자로 큰 수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한국 교민 사회도 한 때 6000명 규모까지 성장해 교민 TV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같은 투자 열기에 대해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한국이 캄보디아와의 지리적, 문화적 근접성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투자에 열의를 보이는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보도했다. 서구 자본 역시 신흥 시장 캄보디아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캄보디아의 인구가 적고(1700만명) 전기나 도로 등 인프라 수준도 떨어져 투자를 주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해 말에 찾아온 세계적 금융위기가 성장 일로에 있던 양국 관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투자 동력을 잃은 교민들이 떠나가고 야심 차게 계획됐던 대규모 부동산 개발 사업 역시 무기한 연기됐다. 한국 대기업들이 빌딩 신축 부지나 신도시 개발용로 샀다가 중도에 포기한 부지를 프놈펜 시내는 물론 교외에서까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성급한 투자가 빛을 발하지 못하는 사례도 있다. 경상북도가 투자한 상업용 빌딩이다. 2006년 경상북도와 경주시는 앙코르와트가 있는 시엠립과 공동으로 앙코르와트문화행사를 벌여 큰 호응을 얻었다. 이에 경상북도는 2008년 수도 프놈펜 중심지에 연면적 9000㎡(지하1층 지상3층)의 대규모 건물인 대구경북문화통상교류센터를 건설했다. 프놈펜 시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한국 건물이다.

당초 계획에 따르면 이 건물은 양국 문화교류와 통상협력의 공식창구여야 한다. 하지만 현재 프놈펜 시민들은 이 건물을 바라보며 "도대체 뭐하는 곳이냐?"며 반문하기 일쑤다. 지나치게 높은 건설비로 인해 임대료가 높게 책정돼 입점업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건물은 면밀한 계획이 없는 '묻지마 투자'의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꼽힌다.

하지만 프놈펜에 사업장을 둔 법무법인 지평지성의 유정훈 변호사는 "캄보디아는 한국에게 여전히 가장 유망한 투자처 중의 하나"라며 "세계경제와 한국 경제가 점차 안정화 되면서 캄보디아 투자가 다시 활기를 띌 것이다"고 전망했다.

●2000년부터 훈센 총리 고문이었던 이명박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이 훈센 총리의 경제 고문을 8년이나 했다고요?"

프놈펜에서 활약하는 한 영국인 사업가는 기자에게 이같이 반문하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20년째 집권하며 '캄보디아의 박정희'로 불리는 훈센 총리의 한국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잘 알려져 있다. 한국의 경제개발 계획을 모방해 빠른 시간 안에 해외 자본을 유치하고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을 근대화하는 작업이 모두 한국식이라는 얘기다. 이 밖에도 2000년에는 이명박 대통령을 경제고문으로 위촉해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2008년 2월 치러진 이 대통령 취임식에 가장 먼저 도착한 국빈이 훈센 총리였다.

프놈펜 시내에는 활기가 넘쳤다. 프놈펜 시내를 관통하는 메콩강 주위에는 캄보디아를 후원하는 국가들의 국기가 마치 UN 본부의 그것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태극기도 보였다.

프놈펜에서 한국인과 함께 건축업을 하는 산멍 씨는 "캄보디아에게 한국은 꿈의 나라에 가깝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키우고 UN사무총장까지 배출한 나라이다"며 "캄보디아가 한국의 도움으로 빠른 시간 내에 정상적인 국가로 발전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이 곳에서 오래 일한 한국인들은 캄보이아에 대한 인식 변화를 주문했다. 4년간 프놈펜에서 봉사활동을 벌인 KOICA 이은숙 단원은 "캄보디아에 대한 대다수 한국인들의 인식은 가난한 공산주의 국가라는 과거의 이미지에 머물러 있다"며 "비극적인 역사를 공유하는 양국간 관계를 진정한 동반자 관계로 한 단계 끌어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프놈펜=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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