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최대 추경예산 집행 현장 따라가보니…

  • 입력 2009년 5월 29일 02시 57분


“돈 있어도 손이 달려” 재정집행 ‘병목’

《“예전에는 신청을 받으면 열흘 안에 지원금을 내줄 수 있었지만 요즘은 돈이 나가는 데 한 달은 걸립니다. 아무리 서둘러도 일손이 모자라서 어쩔 도리가 없어요.” 22일 인천 남동구 경인지방노동청 4층. 이곳에서 고용유지 지원금 업무를 맡고 있는 실무자는 윤정식 기획재정부 재정집행관리과장에게 “금고에 돈은 있지만 나눠줄 일손이 달린다”고 호소했다. 사상 최대 규모의 추가경정예산(28조4000억 원)이 현장에서 제때 풀리고 있는지 점검하려고 인천을 찾은 윤 과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인천 경인지방노동청
“고용유지 지원금 전달, 일손 모자라 한달 걸려”

고용유지 지원금은 경제위기로 경영상태가 악화된 기업이 일자리를 유지할 경우 정부가 기업주에게 지급하는 자금. 경기침체의 골이 깊어지면서 경인지방노동청이 4월에 지급한 고용유지 지원금 규모는 1년 만에 25배로 증가했다. 하지만 해당 업무를 처리하는 인력은 6명에서 10명으로 4명이 늘었을 뿐이다.

기자가 윤 과장과 동행해 예산집행 상황을 취재한 결과 현장에서는 이렇게 돈이 있어도 인력 부족으로 꼭 필요한 곳에 돈이 전달되지 못하는 ‘병목 현상’이 심각했다.

○ 돈 있어도 지급 못해

정부는 추경예산에서 고용유지 지원금을 3070억 원 책정했다. 경기침체로 지원금 신청이 급증하는 현실을 반영한 조치였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인력 부족으로 자금이 묶여 있는 사례가 수두룩했다. 경인지방노동청은 4월에만 379건, 18억3000만 원의 고용유지 지원금을 지급했다. 지난해 4월엔 지원 건수 10건에 지원금은 7300만 원에 불과했다. 지원 건수는 2월 201건, 3월 239건, 4월 379건 등으로 계속 늘고 있다.

노동청 실무자는 “기업이 지원금을 신청하면 지원요건이 되는지 서류심사 작업을 하고, 지원금을 주기 전에 확인하기 위해 현장까지 찾아다니다 보면 휴일에도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행정인턴 6명이 파견돼 있지만 이들은 자금집행 결정을 할 수 없어 큰 도움이 안 된다”며 “일손이 하도 부족해 각서라도 받고 이들을 업무에 투입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

지방자치단체들도 인력 부족을 호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날 찾아간 인천 남구청은 다음 달 1일 시작되는 공공근로사업 ‘희망근로 프로젝트’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박윤주 주민생활지원과장은 “공공근로에 적합한 사업을 발굴하고 신청자를 받느라 업무가 폭증한 데다 최근 감사원에서 사회복지분야 특별감사까지 나와 매일 야근을 하고 있다”며 “너무 일이 힘들어 육아휴직을 신청하는 직원까지 있다”고 말했다.

○인천 소상공인지원센터
“정책자금 10일만에 바닥, 민원인들 빈손 돌려보내”

○ 소상공인정책자금 열흘 만에 바닥

다른 한쪽에선 예산이 부족해 발을 동동 굴렀다. 인천남부소상공인지원센터는 배정받은 정책자금이 바닥나 민원인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고 있었다. 추경예산으로 소상공인정책자금 5000억 원을 확보하고 6일부터 1차분 2700억 원을 풀었지만 10일 만에 자금이 바닥났기 때문이다.

상담원들은 전화기를 들고 “필요하면 은행에서 지원하는 소상공인 대출을 소개해 주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한용명 선임센터장은 “최근 GM대우의 영업부진 탓에 인천 지역의 실업자가 급증하고 있다”며 정책자금을 추가로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 센터장은 윤 과장을 인천 남동구 만수시장 인근 분식집으로 안내했다. 지난해 자동차 관련업체에서 일하다 잇따라 직장을 잃은 모녀가 소상공인 정책자금을 빌려 차린 식당이었다. 딸 박상희 씨(28)는 “2월에 가게를 차릴 때 주변 사람들에게서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 힘들었는데 정책자금 4000만 원을 빌려 갚으면서 부담이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 저신용자 대출 확대로 부실 커질까 우려도

정부는 신용등급이 낮은 무등록·무점포 자영업자를 지원하기 위해 추경예산 중에서 2700억 원을 지역 신용보증재단에 출연했다. 지역 신보재단은 이 돈을 활용해 다음 달부터 자영업자 1인당 최고 500만 원까지 빌려주게 된다.

인천신용보증재단 김한기 이사장은 “정부의 결정으로 어려운 자영업자들을 많이 지원할 수 있게 됐다”면서도 신용등급 8등급 이하인 사람들이 지원 대상이어서 부실률이 크게 높아질까 염려했다. 이날 현장점검을 마친 윤 과장은 “모두가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아쉬운 부분도 적지 않았다”며 “재정집행이 좀 더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인천=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정부 “예산집행 실명제로 누수 방지”▼

정부가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올해 초부터 서둘러 재정을 풀다 보니 집행과정에서 적지 않은 시행착오가 발생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해 정부는 필요한 곳으로 자금이 원활히 흐를 수 있도록 다양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28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정부는 최종 수요자가 지원을 받았는지를 기준으로 하는 새로운 재정 집행률 통계를 다음 달 내놓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중앙부처에서 돈이 나가는 시점을 기준으로 집행률을 집계해 현장의 수요자들이 느끼는 것과 차이가 크다는 지적이 많았다. 정부는 올해 주요 사업비 257조7000억 원 가운데 43%(110조7000억 원)가 4월까지 집행됐다고 밝혔지만 예산 병목현상이 심각한 점을 감안할 때 이 돈이 최종 수요자에게 모두 전달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부는 일부 공무원의 횡령으로 예산이 엉뚱한 곳으로 새는 것을 막고 집행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예산집행 실명제를 도입할 계획이다.

제도 개선에 따른 성과도 일부 나타나고 있다. 정부가 작년 말 사회간접자본(SOC) 공사에 긴급입찰제를 도입한 뒤 70∼90일이 걸리던 입찰에서 계약까지의 기간이 한 달 안팎으로 단축됐다. 정부기관이 공사업체에 먼저 주는 선금(先金) 지급비율도 지난해는 계약액의 20∼30%였지만 올해엔 30∼40%로 늘려 업계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차지완 기자 ch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