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실 ‘사라진 농한기’

  • 입력 2009년 3월 18일 03시 00분


작년 6월 고유가 추경→ 9월 본예산→ 11월 수정예산→ 올해 또 추경

경기침체로 편성주기 바뀌어

부처 - 공기업 직원들 방문에 재정부 청사는 연일 북새통

“1, 2월은 원래 예산 편성의 ‘농한기(農閑期)’인데 올해는 ‘농번기(農繁期)’로 바뀐 셈이죠.”

17일 오전 정부과천청사 기획재정부 407호. 안도걸 복지예산과장의 책상에 놓인 전화기는 잠깐의 대화 중에도 쉴 새 없이 울려댔다.

재정부가 12일 발표한 ‘민생안정 긴급지원 대책’과 관련해 궁금한 점을 물으려는 민원인들의 전화가 일주일 가까이 이어졌다. 이 대책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돈은 안 과장이 짜고 있는 추가경정예산안의 복지예산에서 나오게 된다.

그의 눈은 충혈돼 있었다. 지난달 10일 윤증현 장관의 취임과 함께 시작된 추경 편성에 매달리느라 매일 새벽 2, 3시에야 퇴근하는 탓이다.

안 과장뿐 아니라 재정부 예산실 전체가 비상근무 중이다. 최근엔 부처별 내년 예산의 한도를 정하는 작업까지 시작됐다.

이런 이유로 예산실이 있는 재정부 건물 4층 복도는 각 부처와 공기업 직원들로 연일 북새통을 이룬다. 예년보다 훨씬 빨리 ‘예산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 경기침체가 바꾼 ‘예산철’

대개 정부의 예산 시즌은 5월에 시작돼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기 직전인 9월 말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지난해부터는 들어맞지 않는 말이 됐다. 작년 상반기에 국제유가가 급등하더니 9월엔 미국 금융위기가 터져 그때마다 예산을 대폭 손질해야 했다.

정부는 지난해 6월 ‘고유가 극복을 위한 추경예산’을 편성한 뒤 9월에 본예산을 짰다. 경기침체가 당초 예상보다 심각해지자 두 달 뒤 재정지출을 크게 늘리는 수정 예산안을 편성했다. 예산실 공무원들은 “예전에도 추경을 편성한 적은 있지만 작년처럼 예산을 여러 번 짜본 건 처음”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올해 연초부터 추경 편성이 공론화되면서 예산실은 다시 분주해졌다. 글로벌 경기침체가 한국 정부의 예산 편성 사이클을 연중무휴 체제로 바꾼 셈이다.

○ “예산은 신발 닳은 만큼 나온다”

요즘 재정부 청사 주변에서는 각 부처 공무원이 삼삼오오 모여 “그런 논리는 (예산실에서) 먹히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설득 전략’을 짜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들의 관심사는 막바지 조정 단계에 들어간 추경 예산을 한 푼이라도 더 따내는 것. 특히 보건복지가족부 공무원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예산은 신발 닳은 만큼 나오는 것’이라는 전재희 장관의 소신과 관련이 깊다고 한다.

다른 부처도 절박하기는 마찬가지다.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일하는 한 국장은 “평소 같으면 과장급이 과천을 오가며 발품을 팔았는데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어서 직접 왔다”고 말했다.

예산실 공무원을 만나려고 인맥을 동원하는 ‘줄 대기’ 사례도 많다. 한 공기업 사장은 예산이 삭감되자 정치권을 통해 담당 공무원을 소개받았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답을 듣고 허탈해하며 돌아섰다.

예산 당국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한 해 280조 원이 넘는 예산을 주무르면서 점점 ‘권력화’되고 있다는 일각의 따가운 시선이 부담스럽다. 예산실의 한 국장은 “1조∼2조 원은 작은 돈이 아닌데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인지 각 부처가 조 단위의 예산을 너무 쉽게 요구한다”고 푸념했다.

재정부는 조만간 추경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부처별 내년 예산한도는 다음 달 말까지 확정해 통보할 계획이다. 추경안이 국회로 넘어가면 ‘예산 전쟁’ 2라운드는 국회가 있는 여의도에서 벌어지게 된다.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차지완 기자 c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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