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예상 뛰어넘은 고강도 쇄신… ‘제3의 창업’ 스타트

  • 입력 2008년 4월 23일 03시 02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가운데)이 22일 기자회견에서 경영 일선에서 퇴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배석한 삼성그룹 사장단의 표정이 무겁다. 연합뉴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가운데)이 22일 기자회견에서 경영 일선에서 퇴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배석한 삼성그룹 사장단의 표정이 무겁다. 연합뉴스
■李회장 퇴진 의미 - 삼성 향후 행보

《삼성그룹이 22일 발표한 경영 쇄신안은 일반적인 예상을 뛰어넘는 고강도 조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건희 회장과 이학수 전략기획실장 등 그룹 핵심 경영진의 퇴진은 물론이고 전략기획실 해체, 계열사별 독립경영체제 강화, 삼성카드의 에버랜드 주식 매각 등 하나하나 ‘메가톤급 개혁 조치’로 볼 수 있다. 일각에서는 삼성의 창립과 이건희 회장 체제 출범에 이은 ‘제3의 창업’이란 말도 나온다. 이는 삼성이 그동안 국내에서 경영의 발목을 잡았던 각종 논란을 잠재우고 국내 무대를 벗어나 글로벌 플레이어로서 본격적으로 나서겠다는 신호탄으로 풀이된다. 재계 일각에서는 삼성에 ‘컨트롤 타워’가 실종되면서 장기적인 경영 비전 수립이 어려워지고 스피드 경영에 차질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제3의 창업’ 위한 결단

삼성이 파격적인 내용의 경영 쇄신안을 내놓은 것은 특별검사 수사를 계기로 그동안 글로벌 경영의 발목을 잡아 온 각종 의혹을 한꺼번에 털어내고 새 출발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풀이된다.

특히 삼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애정을 되찾으려면 상당한 수준의 자기희생이 우선돼야 한다는 이 회장의 판단이 결정적이었다는 후문이다.

실제로 이 회장은 특검 수사결과 발표와 무관하게 3월 초에 이미 퇴진할 뜻을 내비쳤다는 게 이학수 전략기획실장의 설명이다.

이 회장은 이날 발표한 ‘대국민 사과 및 퇴진 성명’에서 “지난날의 허물은 모두 제가 떠안고 가겠습니다. (중략) 앞으로 더 아끼고 도와주셔서 삼성을 세계 일류기업으로 키워 주시기 바랍니다”라며 결심 배경의 일단을 피력했다.

이번 조치로 삼성은 1987년 고 이병철 창업주로부터 이 회장이 경영권을 물려받으면서 ‘제2의 창업’을 선언한 지 20여 년 만에 ‘제3의 창업’에 나서게 됐다.

○사회 일각의 ‘발목잡기’에 정면 대응

제3의 창업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 될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이 실장도 이날 쇄신안 내용을 발표하면서 말미에 “오늘 발표한 것으로 삼성의 쇄신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단지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앞으로도 고칠 것이 있으면 적극 고쳐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로써 삼성이 차명계좌 등 과거의 어두운 유산(遺産)에서 비롯된 국내 일각의 발목 잡기에서 벗어나 글로벌 플레이어로 경영에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전략기획실이 해체되고 계열사별 독립경영체제가 한층 강화되면서 톱다운(Top-Down) 방식의 그룹 의사결정 방식도 바뀌어 경영 투명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로 삼성은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의 경우 해외사업 비중이 82%나 되는데도 경영 투명성을 둘러싼 국내의 각종 논란과 발목 잡기로 기업 가치가 상대적으로 저평가돼 있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재계 일각에서는 이 회장의 이번 결단이 자신을 희생해 궁극적으로 모든 분야에서 삼성의 체질을 강화하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삼성의 차세대 총수로 유력시되는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가 최고고객책임자(CCO) 직을 물러나 해외에서 현장경험을 쌓으며 사실상 ‘백의종군’하기로 한 것도 장기적인 관점으로 보면 비슷한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다.

삼성은 또 이번 쇄신안 발표를 계기로 삼성을 조직적으로 흔들려는 우리 사회 일각의 세력에 대해서는 앞으로 어떤 형태의 ‘뒷거래’도 없이 정면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경영 공백 후유증 우려도

쇄신안의 내용이 예상을 뛰어넘는 파격으로 나타나면서 단기적으로는 후유증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삼성을 잘 아는 재계의 한 관계자는 “회장, 전략기획실 등 그룹의 컨트롤 타워가 없어지면 장기적인 경영비전 수립이 어려워지고 사업 구조조정이나 오너 경영의 최대 강점으로 꼽히던 스피드 경영에도 차질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삼성이 투자 기회를 놓치거나 브랜드 가치가 하락하면 국가 경제의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에 따라 다음 달 초부터 줄줄이 이어질 각 계열사 주요 임원 및 간부 인사, 투자 등 경영계획 확정, 채용규모 확정 등 주요 경영 일정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삼성 관계자들은 삼성전자가 지난달 28일 올해 매출 목표를 70조 원 선으로 제시했고 신규 인력 채용도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은 없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다만 삼성 내부에서는 지주회사체제 전환 등 확실한 경영권 방어 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삼성카드의 에버랜드 지분 매각 등으로 순환출자구조가 끊어지게 되면 그룹 전체가 해외의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베이징 올림픽을 100여 일 앞두고 국내 유일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인 이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퇴진한 것이 한국 스포츠외교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앞으로 눈여겨봐야 할 대목으로 꼽힌다.

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발표문 (全文) ▼

저는 오늘 삼성 회장 직에서 물러나기로 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고 할 일도 많아 아쉬움이 크지만 지난날의 허물은 모두 제가 떠안고 가겠습니다.

그동안 저로부터 비롯된 특검 문제로 국민 여러분께 많은 걱정을 끼쳐 드렸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리면서 이에 따른 법적 도의적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삼성가족 여러분.

20년 전 저는 삼성이 초일류 기업으로 인정받는 날, 모든 영광과 결실은 여러분의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어 정말 미안합니다.

국민 여러분께 간곡히 호소합니다. 오늘날의 삼성이 있기까지는 무엇보다 국민 여러분과 사회의 도움이 컸습니다. 앞으로 더 아끼고 도와주셔서 삼성을 세계 일류기업으로 키워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영상취재 : 신세기 동아닷컴 기자


▲ 영상취재 : 신세기 동아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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