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 정해준 대로… ‘정책 짜깁기’ 이젠 지쳐

  • 입력 2006년 11월 18일 02시 57분


“청와대 386 같은 ‘아마추어’들이 너무 오래 정부를 흔들어 놨어요. 걔들이 정치는 아는지 몰라도 경제를 뭘 알겠어요. 부동산 정책이 저 짝 난 것도 그렇고…. 도대체 말만 앞서지 된 게 뭐예요. ‘복지(福祉)’하겠다고 했지만 제대로 복지정책 한 게 뭐가 있어요. 관료사회는 뿌리째 흔들어 놓고 말이지….”

한 경제부처에서 일하는 국장급 공무원의 청와대 386 비판은 신랄했다. 올해 초만 해도 그가 현 정부 실세(實勢)를 이런 식으로 ‘뭉갤’ 줄은 누구도 몰랐다. 그만큼 그는 공무원 가운데는 많지 않을 정도로 현 정권에 대한 ‘로열티’가 강했다. 무엇이 A 국장을 이토록 바꿔 놓았을까.

○ “지금 잘나가는 것도 반갑지 않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좋은 건지 모르겠어. 너무 민감한 때 아닌가…. 앞으로 (정권 교체가 될 때까지) 1년 조금 넘게 남았는데 막판에 잘못되면 밥줄이 끊어질 수도 있잖아. ‘잠망경’을 물 밖에 내놓은 잠수함처럼 주변을 살피고 행동을 조심하는 게 상책인 것 같아.”

최근 한 정부 부처에서 ‘노른자위’로 꼽히는 핵심 보직을 맡은 고위 공무원의 말이다.

“축하한다”는 인사말에 그는 착잡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이런 걸 두고 정권 말기 누수(漏水)현상이라고 했던가. 이미 엘리트 공무원 사회는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30대 중반의 한 공무원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얼마 전 기업과 손을 잡고 의미 있는 일을 해 보려고 며칠 밤을 새우며 의욕적으로 정책 아이디어를 하나 만들었어요. 그런데 담당 과장이 보자마자 ‘킬(Kill)’시키는 거예요. 정권 말기에 조금이라도 잡음이 생길 일은 하지 말라는 거죠.”

정부과천청사에서 일하는 한 과장은 “현 정부의 레임덕은 이미 시작됐다”고 진단했다.

“내년 선거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소신껏’ 정책을 추진할 관료가 몇이나 되겠어요. 정책부서에 있는 사람들은 현 정부가 세운 정책이 다음 정권 때 어떻게 될지 생각 안 할 수 없어요. 잔뜩 공들여 마련한 정책이 다음 정부 때 ‘공중분해’되거나 철학이 다른 정권이 들어선 뒤에 비판의 표적이 되면 어떡합니까. 더구나 지금까지 해온 정책이 대체로 ‘실패’로 판명이 난 상황 아닙니까.”

○ ‘정책 기술자’ 비판에 가슴 아파

“과거 선배 관료들은 정치사회적 분위기가 무르익어 기회가 왔을 때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한번 해보자’는 신념과 철학으로 정책을 만들었어요. 과장급만 돼도 윗사람이 잘못된 정책을 만들면 대들기도 했지요. 지금은 어떨까요? 정책의 방향과 철학은 모두 ‘위(청와대를 지칭)’에서 정해지고, 관료들은 거기에 맞춰 정책을 ‘짜깁기’하는 데 급급해하지요.”

정부중앙청사에 근무하는 50대 초반 고위 공무원의 고백이다.

그는 “요즘 친구들에게서 소신 없는 ‘정책 기술자’란 비난을 들어도 변명할 말이 없다”고 털어놨다. “내가 만든 정책이라면 애정이나 확신이 있어야 할 텐데 요즘은 그런 것도 없다”고 했다.

상대적으로 젊은 관료의 상실감은 더 깊어 보였다. 40대 초반의 한 공무원은 이렇게 털어놨다.

“이 정부 초기엔 ‘어쩌면 세상을 더 좋게 바꿔 볼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기대감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소한 저는 세상이 달라진 만큼 정책도, 관료사회도 바뀌어야 한다는 노무현 정권의 주장에 정말 공감했습니다. 선배들의 ‘낡은 생각’에 불만도 많이 쌓여 있던 터라…. 그래서 열심히 일했지요. 그런데 정권이 해온 것을 보면 ‘정말 이건 아니다’ 싶어요. 이젠 믿음도 사라졌고 정말 지쳤습니다.”

○ 상사가 부하 눈치 보기도

한 과장급 공무원은 올해 초 업무와 관련해 ‘억울하게’ 불이익을 받자 공무원 생활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고 고백했다.

업무 처리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고, 그의 책임이 없다는 것을 상사들이 알고 있는데도 ‘외부’를 의식해 불이익을 줬다고 주장한다.

“잘못한 일까지 덮어 달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누가 봐도 정당한 업무인데도 결과가 나쁘다며 책임지라는 상사를 누가 믿고 따르겠어요.” 그는 “이제 공직사회에서 ‘보스’를 믿고 충성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단언했다.

전통적으로 위계질서를 강조하던 공무원 사회에 ‘혁신 인사제도’가 도입되면서 생긴 부작용도 적지 않다. 그중에서도 ‘다면평가’는 선배와 후배를 서로 눈치 보는 ‘이상한’ 관계로 변질시켰다고 평가하는 공무원이 많다.

“요즘 체육대회, 등산대회 같은 걸 해봐야 젊은 사무관들은 절대 안 나옵니다. 자기들한테 도움이 되는 게 없다는 거죠. 그런 걸로 눈치 주면 부하가 상사를 평가하는 다면평가에서 불이익을 각오해야 합니다. 저녁 때 늦게까지 남아 있거나 주말에 나와서 일하는 것도 신경 쓰입니다. 후배 눈치 봐야 하는 세상입니다.”(한 국장급 공무원)

○ ‘섬’에 갇힌 공무원들

조직 내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 부처 내 공조(共助)도 어려워졌다는 평가가 많다.

“예전에는 실무자는 실무자끼리, 국장은 국장끼리 만나 정책 개발을 위한 고민을 함께 나눴는데, 지금은 자기 일만 하려고 합니다. 여러 부처가 만나 합의를 이뤄내야 할 사안이 있어도 각자 자기들 주장만 펴요. 그러니 부동산 정책, 기업 정책 같은 중요한 정책이 제대로 추진되기가 힘들죠.”(한 1급 공무원)

‘투명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업무와 관련 있는 외부 인사를 만나는 것도 부담이 돼 꺼리게 된다고도 했다.

한 경제부처 과장의 말. “예전에는 정책 수립에 참고하기 위해 기업인들이 하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요즘은 어디 그런가요. 기업인 만나다가 행여 안 좋은 소리 나올까 봐 가급적 피합니다. 이거 할 소리는 아니지만 이래서 ‘탁상행정’이 더 심해지는 것 아닌가요.”

그러면서 “현장 나갈 일이 없으니 하루 종일 앉아서 인터넷만 본다”며 “상당수 젊은 직원은 연예 뉴스, 스포츠 뉴스를 줄줄이 꿰고 있다”고 귀띔했다.

엘리트 관료가 인터넷만 두들긴다니, 그냥 답답한 마음에 털어놓은 속내가 스스로도 너무 적나라했는지 그는 마지막 코멘트(인터넷 언급 대목)는 빼 달라고 했다. 그렇지만 2006년 11월 공무원 사회의 분위기를 있는 그대로 전하기 위해 그냥 놔두기로 했다.

<특별취재팀>

▽경제부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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