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정주영 모든 이의 아쉬움 속에 永眠

  • 입력 2001년 3월 25일 08시 25분


고 정주영 명예회장 발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 발인.
아산(峨山) 정주영(鄭周永)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

신화를 만들어낸 거인, 강원도 시골소년에서 세계적 기업가로 성장했던 정 전회장이 모든 이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평화 속에 잠들었다.

원로시인 구상씨는 추모시에서 "하늘의 부르심을 어느 누가 피하랴만…겨레의 모든 가슴이 허전하기 그지없네"라고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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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인 운구 영결식

▼발인▼

25일 오전 7시50분 빈소가 차려진 서울 종로구 청운동 자택에서 정몽구 현대차 회장, 정몽헌 현대건설 회장, 정몽준 의원 등 유족들과 현대 관계사 사장급 이상이 참석한 가운데 발인이 거행됐다.

발인을 관장한 스님이 "정주영 명예회장님이시여 서방극락세계에 상품상생으로 왕생하시옵소서"라는 조문을 나즈막히 외우자 맏상주 정몽구 회장이 먼저 재를 올렸다.

이어 상주들이 동시에 정 전회장 영정을 향해 절을 하며 곡을 했다.

10여분간 진행된 발인에서 6남 정몽준 의원은 내내 눈시울을 붉혔다.

정각8시 영정차를 선두로 장례행렬이 청운동 자택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운구▼

이날 운구는 현대 관계사에서 뽑은 24명의 직원이 3개조 8명씩으로 나눠 조심스럽게 이뤄졌다.

이들은 각 계열사에서 신장 175㎝로 체격을 맞춰 1명씩 뽑은 직원들이다.

영정 운반은 장손인 정의선 현대차 상무가, 위패는 정 전회장의 비서로 고인을 `그림자' 처럼 모셔왔던 이병규 현대백화점 사장이, 훈장운반은 마지막까지 고인을 모신 비서실 김상철 과장이 각각 맡았다.

고 정 주영 명예회장 운구

그 뒤는 운구차와 상주 및 가족들 100여명이 뒤따랐다.

여동생들은 "오빠 어디가, 난 어떡해" 하며 계속 통곡했다.

이날 장례행렬은 승용차에 대형 영정을 설치했을 뿐 평소 고인의 근검절약의 정신을 본받아 꽃장식도 거의 하지 않은 채 검소한 모습이었다.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은 "재계 거목의 장례행렬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검소한 행렬"이라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간소하게 한다는 원칙에 따라 노제도 지내지 않았다.

장례행렬이 내려오는 청운동 자택 골목길 700여m에는 계열사 직원 1000여명이 골목길 좌우로 도열해 고인이 가는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청운동 주민들도 거리로 나와 한국경제의 큰별이 떠나는 마지막 길을 보면서 "고인이 영면할 것"을 기원했다.

한 50대 주부는 "고 정주영 회장은 동네의 자랑이었다. 늘 검소하셨던 분이었는데…"하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정 전회장의 장례행렬은 경찰 차량의 선도 아래 청운동 자택을 떠나 오전 8시50분쯤 고인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계동 현대사옥에 도착했다.

계동 사옥에는 현대건설을 비롯한 현대 관계사 임직원 1000여명이 나와 정 전회장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정 전회장은 2000년 5월 현대건설 이사진에서 물러나기까지 54년을 현대건설과 함께 해왔다.

정 전회장의 운구차량은 현대 계동사옥을 한바퀴 돌아 오전 9시 영결식장인 서울 풍납동 중앙병원으로 향했다.

경찰은 서울 도심 편도 4차선 가운데 버스 전용차선을 제외한 3개 차선을 통제한 채 운구행렬을 선도했다.

세종로 도로변에는 현대화재 임직원 500여명이 나와 고인을 배웅했다.

장례행렬은 계동 사옥을 떠나 세종로~남대문~삼각지~국방부앞~반포대교~올림픽대로를 거쳐 오전9시45분쯤 영결식장인 중앙병원에 도착했다.

▼영결식▼

정 전회장의 영결식이 오전10시 유족 및 현대 임직원과 각계인사 7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풍납동 중앙병원 운동장에서 열렸다.

이인원 현대 고문의 사회로 진행된 영결식은 고인에 대한 묵념, 약력보고, 고인의 육성녹음 청취, 추모사, 헌시, 헌화·분향 순으로 진행됐다.

단상중앙에는 고인의 대형 영정과 함께 다섯개의 향로가 놓여 있으며, 단상 양옆에는 대형 스크린 2대가 설치됐다.

정몽구, 몽근, 몽헌, 몽준, 몽윤, 몽일등 상주들은 단상아래 맨 앞에 자리를 잡았다.

먼저 정 전회장에 대한 묵념이 있은후 고인을 옆에서 20여년간 모신 이병규 현대백화점 사장이 고인의 약력을 소개했다.

이사장은 약력소개에서 "고인은 조국이 고비에 처했을 때마다 불굴의 도전정신과 기업가 정신으로 나라를 일으켜 세운 큰별 이었으며, 88서울올림픽 유치, 소떼몰이 방북등 이 나라의 모든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기셨다"고 말을 시작했다.

이 사장은 약력소개를 마칠 즈음 고인과의 추억때문인지 말을 잇지 못하고 끝내 울먹였다.

이후 순서는 '생전 고인의 영상시청'.

영상은 "우리시대를 지켜온 큰 별이 떨어졌다. 아산 정주영. 잡으려고 했으나 흐르는 세월을 어쩔수 없는지, 잡는 소매를 뿌리치고 끝내 우리 곁을 떠났다"는 말로 시작됐다.

고인은 대형 멀티비전으로 중계된 생전 육성녹음을 통해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긍정적인 생각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마지막 메시지를 전했다.

고인의 살아생전 육성과 함께 경부고속도로 건설, 88올림픽 유치, 소떼몰이 방북 때 장면이 편집되어 나왔다.

순간 영결식장은 `거목'을 떠올리며 마지막으로 깊은 명상에 빠져 들었다.

단상의 맨 앞에 자리잡은 몽준, 몽윤 등 형제는 고인이 된 아버지의 육성과 함께 주요 활동장면을 담은 영상물이 스크린을 통해 나오자 손을 들어 붉어진 눈시울을 닦아냈다.

특히 "고인은 평생 근검 절약의 정신으로~"라는 대목에서 맏상주인 몽구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념에 잠기는 표정이었다.

추모사는 호상(護喪)인 유창순 전경련 고문과 김상화 삼양사 명예회장이 맡았다.

유 고문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비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정 회장님께서 걸어오신 발자취는 우리 경제의 역사였으며 정 회장님께서 추구한 산업보국은 우리 민족이 기원한 미래상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유 고문은 "정 회장님께서는 평소 세계인들의 눈과 귀를 의심케 하는 수많은 신화를 창조하셨습니다"면서 "백사장 사진 1장을 갖고 대형선박 2척을 수주한 것은 불가능을 가능케 한 것으로 정 회장님의 천재 기업가의 소질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입니다"라고 고인을 추모했다.

이어 삼양사 김 명예회장은 "고인의 육성과 몸짓이 아직도 생생하기만 한데 영영 우리곁을 떠나시니 참담합니다"라면서 "고인은 재계화합을 이끌어내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촉진시킨 기폭제 역할을 했습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못다 베푼 탁견과 소신을 후배 기업인의 몫으로 남기고 가셨으니 만큼 저희들이 더욱 분발하겠습니다"라고 밝혔다

고인과 오랜 교분이 있는 원로시인 구상씨는 탤런트 최불암씨가 대신 읽은 추모시에서 "하늘의 부르심을 어느 누가 피하랴만/ 천하를 경륜하신 그 웅지 떠 올리니/ 겨레의 모든 가슴이 허전하기 그지없네"라고 추모했다.

최불암씨는 헌시낭독을 마친후 "회장님을 부축해 드릴 수 없는 저희를 용서하시고 한발 한발 잘 가십시오"라며 울먹였다.

이어 유가족 임직원 조문객들의 헌화와 분양이 있은후 오전10시 40분쯤 영결식이 끝났다.

영결식에는 한광옥 청와대 비서실장, 신국환 산업자원부장관, 김각중 전경련 회장, 동아일보 김병관 회장·김학준 사장, 이홍구 전 총리, 한승주 전 외무장관, 서영훈 대한적십자 총재, 박홍 전 서강대 총장 등이 참석했다.

운구행렬은 오전10시50분 영결식장을 떠나 오전 11시50분쯤 장지인 경기 하남시 창우동 가족묘역 입구에 도착했다.

▼선영 주변▼

정 전회장이 영면한 경기 하남시 창우동 선영은 조촐했다.

재계 거목의 선영이었지만 이 곳에는 그 흔한 비석조차 없어 일반인의 묘역처럼 검소해 보였다.

해발 657m의 검단산 자락인 선산은 1만평(3만2800㎡)으로 고인의 선친 정봉식(鄭捧植), 어머니 한성실(韓誠實)씨 묘와 다섯째 동생 신영(信永)씨의 묘가 있었다.

묘막은 40여평의 단층 건물로 74년 지어진 그대로였고 부속건물은 10여평 규모의 창고뿐이었다.

고인의 부모 묘역은 70평 남짓이었고 봉분은 3∼4평에 높이도 1m 정도였다.

이곳은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 멀리 서울과 의정부가 보이고 남한강과 북한강, 팔당호가 한눈에 들어왔다.

주민 김복현씨(57)는 "검단산은 명당으로 알려져 저명인사들이 묏자리로 잡아놓은 곳이 많다"고 말했다.

선영에서는 지난 22일부터 현대그룹 관계자 10여명이 모여 정 전회장이 영면할 선영을 관리하고 있었다.

▼안장식 ▼

지난 반세기동안 한국경제를 이끌어온 거목 정 전회장이 25일 낮 12시50분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선영에 묻혔다.

정 전회장의 묘는 고인의 선친 정봉식, 어머니 한성실씨 묘 바로 아래에 같은 규모로 조성됐다.

장례행렬이 묘막 입구에 도착한 것은 오전11시50분쯤. 운구행렬은 곧장 정 전회장이 묻힐 곳을 향해 이동했다.

이 곳에서 가족 묘역까지 직선거리로 200m 남짓 산길을 현대 계열사에서 차출한 건장한 직원 24명이 교대로 운구에 나섰다.

유족들은 소나무길을 따라 그 뒤를 걸어갔다. 현대 직원들은 소나무길 양옆에 도열해 고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묘역에 도착한 뒤 정몽구 현대차 회장을 비롯한 상주들은 고인을 위해 마지막 재를 올렸다.

대형 태극기로 둘러싸인 고인의 관은 낮 12시20분경 영면할 지하의 땅 '광중(壙中)'으로 내려졌다.

그리고 약 30여분간 하관절차가 진행됐다.

낮 12시50분 몽구 몽근 몽헌 몽준 몽윤 몽일등 상주들이 유족들의 오열속에 고인의 관위에 마지막 흙 한삽을 떠 정성껏 얹어 주었다.

다른 가족들과 탤런트 강부자씨도 흙을 관 위에 뿌렸다.

곧이어 장례식 관계자들이 긴 장대를 이용해 흙을 다졌다.

묘역 주변에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전대통령이 보낸 조화가 세워져 고인의 넋을 위로했다.

묘막의 입구에는 지역주민, 등산객등 300여명이 모여 고인이 가는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동아닷컴 특별취재반 duck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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