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부실은 소유주-회계사-정부 합작품"윤종훈 회계사

  • 입력 2000년 7월 31일 18시 51분


국제통화기금(IMF)관리 체제가 시작된 뒤 공인회계사들이 감사대상 기업과 ‘한 몸’이 돼 부실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아 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달 23일 대우그룹 부실감사의 책임을 물어 금융감독원이 공인회계사들을 무더기로 조사키로 했다는 보도를 접한 윤종훈(尹鍾薰·40·사진)씨의 심경은 착잡했다. 회계사 경력 10년의 그는 “한국의 회계부실은 도덕적 해이에 빠진 기업가와 회계사, 그리고 이를 묵인해 온 정부의 합작품”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이 같은 참담한 심정을 장문의 글에 담아 인터넷에 올렸다. 가슴속에 묻어둘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읽고 생각해보자는 취지에서였다.

‘자본주의의 파수꾼’을 꿈꾸던 그가 현실의 장벽을 절감한 것은 91년 수습회계사로 한 특급호텔에 대한 감사를 마친 직후. 그 회사 직원들과의 술자리에서 “너무 꼬치꼬치 따져 피곤했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옆자리의 선배 회계사가 “일 잘했다는 얘기로 알겠다”고 눙치자 경리이사는 한술 더 떴다. “그렇게 나오면 회계법인을 바꿀 수밖에 없습니다.”

술자리는 냉랭해졌고 윤씨는 그 날 이후 큰 좌절감을 맛봤다. 감사대상 기업마다 회계장부 조작을 당연한 일로 생각했던 것.

“대개의 회계사들이 비슷한 길을 걷습니다. 처음 2, 3년은 비도덕적인 일에 흥분하다가도 곧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피곤하게 싸우기보다 재고자산을 부풀리고 비용을 누락시킨다든지 영업외 이익을 부풀려 수익이 많은 것처럼 조작하는 등 고전적 수법들을 배워갑니다.”

한 무역회사를 감사할 때의 일. 회사측이 제시한 당기순이익 500억원을 뜯어보니 땅 판 대금 1000억원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이는 이듬해 1월에나 들어올 돈이었다. ‘500억원 적자’를 ‘흑자’로 바꾸기 위해 이 돈을 미리 받은 것처럼 거짓장부를 작성했던 것. 회사측은 “실적이 손실로 나오면 주가가 떨어지고 은행 대출도 어려우니 덮어달라”고 사정했다. 결국 회사측 요구를 받아들여야 했다.

감사대상 업체와의 잦은 술자리, 골프회합은 이런 요구를 더욱 묵살하기 힘들게 한다.“IMF이후 회계사들의 신뢰도가 급락하며 외국법인과 제휴한 대형 회계법인들은 일거리가 늘어난 반면 대부분의 회계사들은 죽을 맛이다. 수수료가 자유화돼 덤핑까지 이뤄진다. 배고픈 회계사들에게 투명한 감사는 배부른 소리다.”

윤회계사는 최근 ‘닷컴 위기론’이 번지며 벤처업체 사장들로부터 무조건 영업이익을 낸 것으로 장부를 만들어달라는 주문도 많다고 소개했다.

이 같은 관행에는 ‘정경유착’도 한몫 한다는 것. 정부에 사무기기를 납품하는 한 중소업체를 감사할 때 허위 세금계산서를 발견하고 따져 물었다. “비자금 마련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다른 회사도 마찬가지”라는 사장 설명에 그는 할 말을 잃었다.

2년 동안 참여연대의 조세개혁팀장으로 일해온 윤씨는 6월부터 아예 회계사 일을 접고 ‘돈세상(www.donsesang.com)’이라는 인터넷 사이트 구축에 매달려 왔고 이 사이트에 올린 첫 글에서 그는 자신의 직업을 ‘자본주의의 개’라고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앞으로는 ‘서민주머니 관리법’ ‘탈세 및 회계부실 고발’ 등 자신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전념할 생각이다.

김일섭(金一燮)한국회계연구원장은 윤회계사가 고발한 관행들에 대해 “주주총회 이사회 등을 장악한 회사 소유주에 대항해 감사의 독립성을 확보할 장치가 별로 없다”며 “결국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 같은 현실의 개선책과 관련해 김원장은 “정부는 경영자로부터 독립된 감사위원회가 외부감사인을 지명토록 하는 등의 제도적 장치를 내놓았으나 경영자 입맛대로 위원을 선정하기 때문에 유명무실하다”고 안타까운 심정을 밝혔다.

<허문명·이헌진기자>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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