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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12월 5일 17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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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는 이 회사의 사업계획서와 연구실적 등을 면밀히 검토한 뒤 동료 사채업자들과 컨소시엄을 형성해 30억원을 투자했다. 액면가 30억원어치의 주식을 장외 매입하면서 투자액에 대해 연 5%의 금리를 별도로 붙이는 조건이었다.
이 업체가 코스닥에 상장된 이후 돈을 댄 사람들이 엄청난 수익을 올려 명동 사채시장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한때 활동이 극도로 위축됐던 사채업자들이 최근들어 ‘캐피털’ ‘컨설팅’ ‘투자자문’ 등의 간판을 내걸고 제도금융권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틈새 금융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급전을 빌려주고 고리를 받는 고전적 사채행태에서 벗어나 웬만한 은행 뺨치는 과감한 금융기법을 도입해 ‘제3금융권’으로의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것.
▽금융 틈새시장 공략〓대기업에 전자부품을 납품하는 B사는 운전자금이 부족해지자 사채시장을 찾았다. 공장 등 담보가 될만한 물건은 이미 금융기관에 모두 잡힌 상태여서 추가대출이 곤란했기 때문.
사채업자는 대기업 납품계약서만을 믿고 15억원을 연 15%에 빌려줬다. 그 대신 ‘B사가 약정한 날짜에 돈을 갚지 못할 경우 납품대금을 우선적으로 회수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규정상 담보만을 고집하는 은행과는 달리 납품계약서의 채권회수 보장기능을 제대로 평가한 사채업자의 안목에 B사 자금담당자는 무릎을 쳤다는 후문.
모 은행에서 14.5%의 높은 금리로 돈을 빌려써온 건설업체 C사는 보유중인 대기업 진성어음을 연 9%에 사채업자 D씨에게 넘기는 방식으로 고금리 대출을 모두 갚았다. 평소 은행과 거액을 거래해온 D씨는 ‘협상력’을 발휘해 이 어음을 연 7∼8%에 할인해 차익을 챙겼다.
▽큰손과 전문인력의 결합〓사채업자들이 이처럼 공격적인 영업에 나설 수 있게된 가장 큰 이유는 금융구조조정 과정에서 퇴출된 종금사 등 금융기관 출신의 전문인력을 대거 영입했기 때문. 실제로 최근 사채시장에서는 자금동원력이 있는 전주 4,5명이 돈을 대고 자금운용은 전문가 집단이 책임지는 형태의 제휴가 일반화되는 추세다.
A씨는 “독자적인 대출심사 능력이 확보된 덕택에 유망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 투자에 눈을 돌리게 됐다”며 “‘엔젤’로 불리는게 겸연쩍긴 하지만 주변에도 벤처투자로 재미를 본 사채업자들이 의외로 많다”고 전했다.
전직 금융계 인력의 사채시장 진출은 인맥을 매개로 은행 등 금융기관과 ‘암묵적 협력’을 통해 이뤄진다.
▽폐해도 우려돼〓사채시장의 한 관계자는 “금융기관이 사채업자의 건물 예금 등을 담보로 삼아 급전이 필요한 기업에 돈을 빌려주면 사채업자는 대출금중 일정액을 수수료로 떼는 형태의 변칙적인 거래도 일부 이뤄지고 있다”고 실토했다. 이 경우 금융기관은 대출금의 부실화를 방지하고 사채업자는 비교적 손쉽게 수익을 챙기며 기업은 사채업자가 아닌 금융기관의 돈을 빌렸다는 점에서 대외이미지를 높이는 효과를 거둔다는 것.
일각에서는 사채업자의 영역확대를 금융권간의 업무구분이 사라지는데 따른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제도권과 비제도권의 유착에 따른 폐해를 걱정하는 시각도 있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