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 하춘화도 검열받고 무대 오르던 그때 그 시절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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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委, 심의대본 원문 공개
유명가수 무대 대본-악보 검열… ‘가사와 창법 저속’ 이유로 금지
군대-정부 소재의 공연도 안 돼…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 반려도

1979년 극단 실험극장이 공연용 대본으로 번역한 우디 앨런 원작의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번’의 한 페이지가 심의에서 삭제 표시됐다(위 사진). 트위스트김의 ‘폭발 일초 전’ 악보는 가사와 곡이 저속하다는 이유로 공연이 금지됐다. 아르코예술기록원 제공
1979년 극단 실험극장이 공연용 대본으로 번역한 우디 앨런 원작의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번’의 한 페이지가 심의에서 삭제 표시됐다(위 사진). 트위스트김의 ‘폭발 일초 전’ 악보는 가사와 곡이 저속하다는 이유로 공연이 금지됐다. 아르코예술기록원 제공
“퇴역 장군 역할은 다른 인물로 개작(改作)할 것.”

“희곡으로서의 문학성 결여로 심의 결정할 수 없음.”

정성 들여 쓴 공연 대본에는 단어마다 빨간색 줄이 쫙쫙 그어졌다. 대본 한 페이지가 통째로 삭제 지시를 받는 일도 부지기수. 아예 첫 장에 “주제가 부적당하다고 사료되어 반려합니다”라는 한 문장이 적히면 두꺼운 대본은 한낱 종이뭉치가 되어버리곤 했다. ‘반려’ ‘개작’ ‘수정’ ‘조건부 통과’ 등이 찍힌 시퍼런 도장은 민주화 이전 국내 공연예술가들이 숱하게 접한 문구였다.

모든 공연이 국가기관의 심의를 거쳐야 무대에 오를 수 있던 시절. 당시 심의를 받은 대본 5900여 편의 원문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기록원이 공연예술 심의 대본 및 서류들을 최근 공개한 것. 심의 주체는 시대에 따라 문교부(1961∼1966년)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1966∼1976년) 한국공연윤리위원회(1976∼1986년) 공연윤리위원회(1986∼1997년)로 바뀌었다.

1960∼80년대에 군과 정부에 대한 소재는 금기에 가까웠다.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기관이 판단한 이야기는 물론이고 이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문구조차 반려되기 일쑤였다.

이강백의 희곡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사람 같소?’(1978년)에선 극 중 ‘퇴역 장군’이란 역할이 등장한다. 당시 심의위원은 군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대본 속 캐릭터를 새로 바꾸라는 지시를 내렸다. 윤대성의 희곡 ‘노비문서’(1978년)의 대본 두 번째 장에는 반려 표시가 짙게 남아 있다. 구체적인 사유조차 없다. 유신체제 말기 신분 해방을 둘러싼 갈등과 사랑을 소재로 한 작품이 부적절했을 것이라는 추정만 나왔을 뿐이다. 오태영의 희곡 ‘난조유사’(1977년)에서는 등장인물이 “초급대학을 나오고 몇 차례 시험을 쳤지만… 아직 합격이 안 돼서” 같은 문장이 사회 비관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이유로 삭제 조치를 받았다.

유해 표현, 외설적 표현으로 낙인찍는 사례도 많았다. 이근삼의 ‘국물 있사옵니다’(1975년)에서 “발자취엔 피 냄새가 따랐소. 피 냄새를 풍기며 짙은 피 냄새를 뿜으며 왕좌에 오른 거요” 같은 대사는 표현이 잔혹하다는 이유로 “발자취엔 그런 시련이 뒤따랐거든”으로 수정됐다. ‘일본인’ ‘영어잡지’ 등은 왜색(倭色)이나 외국 문물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수정됐다. 최인호의 ‘달리는 바보들’(1975년), 김광림의 ‘아침에는 늘 혼자예요’(1978년), 우디 앨런의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번’(1972년) 같은 유명 작품도 심의를 거쳐야 했다.

트위스트김 하춘화 나훈아 등 유명 가수들의 공연도 사전에 대본과 악보를 제출했다. 가수의 공연에 앞서 짤막한 ‘반공(反共)극’ 대본이 붙어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가사, 곡, 창법이 저속”하다는 이유로 금지 조치를 당하면 해당 노래는 공연에서 아예 부를 수 없었다.

공연 심의 제도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심의위원 명단 공개 등의 변화를 거쳐 1997년까지 유지됐다. 그러다 1996년 10월 헌법재판소가 영화 사전 검열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린 데 이어 2년 뒤 영상물등급위원회가 발족한 것을 계기로 이 제도가 폐지됐다.

김현옥 아르코예술기록원 학예연구사는 “심의와 검열에도 불구하고 공연예술인들은 끊임없이 대본을 고치고 작품을 새로 써가며 열정을 불태웠다. 현재 심의가 없어도 공연이 지나치게 외설적이거나 폭력적으로 흐르지 않는 건 예술인 스스로의 자정 노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심의대본#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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