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석의 시간여행]장충단과 박문사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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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박문사.
일제강점기의 박문사.
‘발 아래가 장충단. 장려할 장(奬)자에 충성 충(忠)자니 더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 곳. 혼백은 간 곳 없고…장충단 공원의 기슭에는 새문안 서궐을 지키고 있던 흥화문(興化門)이 새로 앉은 박문사의 수직(守直)이처럼 옮기어 있으니….’(동아일보 1933년 6월 6일자)

한옥 호텔이 들어선다는 서울 신라호텔 자리를 83년 전 상공에서 내려다본 광경이다. 여의도에서 이륙해 남산을 넘으며 저공비행으로 굽어보는 시야에 준공된 지 8개월 된 박문사(博文寺)가 들어온다. 호국영령을 모신 장충단의 동쪽 언덕에 올라앉은 박문사는 장충단을 내려다본다. 새문안 서궐(西闕), 즉 경희궁의 정문을 떼어다가 박문사의 정문으로 삼은 모양이 마치 문지기처럼 보인다는 뜻의 기사다.

박문사는 장충단과 경희궁 정문을 발아래 두고 배치됐다. 건축 재료도 광화문의 석재를 떼어오고, 경복궁의 선원전에서 목재를 뜯어와 지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리는 일본 사찰 박문사가 그의 23주기를 기해 완공되어 1932년 10월 26일 낙성식을 가졌을 때 조선총독 이하 내외빈 1000명이 모였다. 일왕이 하사한 은제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향연이 단풍으로 물든 남산을 배경으로 퍼져나갔다. 6개월 뒤에는 고국을 방문한 영친왕 이은 부부가 박문사를 참배했다. 1년 뒤 이토 히로부미의 24주기에는 박문비(博文碑)가 세워졌다.

그런데 장충단은 덩그러니 방치됐다. 주변 일대는 공원으로 변해 행락객이 모인다. 언덕 위 박문사를 향해 참배객이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내리는 것과 대조적이다. 장충단 비석의 앞면 세 글자는 순종이 황태자 시절에 쓴 것이며 뒷면의 글은 장충단 건립을 추진한 실무자 민영환이 썼다. 을미사변 때 순사한 장병들을 비롯한 수백 명의 군인을 기리는 이 제단이 을미년 5년 후인 1900년에 건립되고 5년 후 을사년에 민영환은 자결했다. 장충단에서는 해마다 봄가을로 엄숙한 제사가 치러졌다.

‘제삿날만 되면 서울의 각 연대로부터 군인들이 일 중대 혹은 일 대대씩 나와 수천 군사들이 쭉 둘러서서 비장하고도 엄숙한 제사를 드렸다. 유족들은 비통함을 달래며 눈물지었고. 군인들은 제사를 마치고는 받들어총을 하고 보무당당한 분열식을 거행하였다. 참 장관이었다.’(동아일보 1925년 6월 13일자)

그 같은 장충단 제사는 을사늑약 이후 왜소해지고 엉성해졌다. 가사를 고쳐 부른 아리랑타령이 나온 것이 이맘때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남산 밑에 장충단을 지어놓고/받들어총만 하누나 아라리오.’

그리고 군대가 해산되었다. 그로부터 제사도 끊겼다. 장충단은 사당이 헐리고 퇴락해갔다. 1920년대 들어서는 공원이 됐고 비석은 놀이꾼들 사이에서 외롭게 자리를 지켰다.

광복이 되어 박문사는 파괴됐다. 곧이어 임시정부 요인을 비롯한 각계 인사 수백 명이 장충단에 모여 안중근 동상을 박문사 자리에 건립하기로 결의했다. 그런데 안중근 동상 건립은 지지부진했다. 1959년이 되어서야 박문사 터가 아닌 남산 중턱에 세워졌다.

박문사 자리에는 1967년 영빈관이 섰다. 정부의 영빈관이다가 1973년 기업의 영빈관으로 넘어갔다. 박문사는 사라졌지만 그리로 오르는 길고 가파른 돌계단은 남았다.

흥화문은 1988년 박문사의 정문을 떠나 경희궁의 정문으로 되돌아갔다. 박문사는 사라졌는데 장충단은 복원되지 않았다. 계속 공원이었고 참배객 아닌 행락객으로 붐볐다.

그 사이에 비석 하나만이 맨몸으로 비바람 맞으며 우두커니 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기 쓰인 글귀 ‘의열(義烈)은 서리와 눈발보다 늠름하고 명절(名節)은 해와 별처럼 빛나니…’도 더불어 쇠락해간다. 안중근 의사 동상에 대한 기억이 흐릿해지는데 비석의 글귀마저 풍상에 닳아버린다면 후대에 한 맺힌 역사와 유적을 떠올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
#박문사#장충단#을사늑약#아리랑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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