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사랑을 누려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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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어머니의 유언
[잊지 못할 말 한마디]신현림(시인)

신현림(시인)
신현림(시인)
나도 아주 깊은 상실감에 시달린 때가 있었다. 어머니를 잃은 후 오랜 세월 글을 써 모은 돈도 잃고, 폐인처럼 망가질 듯 휘청거린 세월이었다. 기억을 떠올리면 더없이 우울하고 외롭게 애를 키우며 간신히 생존했던 세월이었다.

엄마의 말년은 2년 가까운 의식불명이셨다. 엄마가 쓰러지시기 전에 하신 말씀들이 유언이 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너도 사랑을 누려라.” 일만 하지 말고 연애하란 뜻이다. 일만 하던 내가 딱해 보였을 것이다. 살아내기도 버거운 내게 연애는 지금도 사치다. 당시 내게 사랑은 조약돌처럼 단단한 것이 아니었다. 금세 녹는 각설탕처럼 덧없는 것이기에, 엄마의 유언은 내게 큰 숙제가 되어 버렸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사랑이여 다시 한번, 이렇게 나를 다독이며 남자들을 소개받고 프러포즈도 받았다. 하지만 역시 내 짝은 아니라는 허망한 느낌 속에 이뤄지는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이 싫었다. 그리고 내일을 걱정하며 여행까지 내일로 미루며 시들어가는 삶이 견딜 수 없었다. 진짜 인연은 하느님께서 주실 거라 믿고, 어느 날 나는 모험 가득한 여행과의 연애를 선택했다.

아이를 어디 두고 다닐 상황이 아니었기에 2인분의 여행 경비를 마련해야 했다. 엄마가 가게를 운영하며 채마밭을 가꾸고 아름다운 마당의 추억을 준 것처럼 강렬한 추억을 내 딸에게도 주고 싶었다. 학교 수업도 중요했지만, 초등학생 때라 함께 떠날 수 있었다. 이집트 여행을 준비할 때 내 통장 잔액은 석 달 살 것밖에 없었다. 생활비가 떨어진다는 것은 사랑보다도 더 심오하고 심각한 문제였다. 나는 파산하면 어쩌나, 두려웠다. 이왕 마음먹은 거 ‘뭘 하든 두려움은 바위의 이끼처럼 돋아나기 마련이야. 두려움을 이기는 순간부터 지혜를 얻고, 인생도 순조롭게 풀려갈 거야’ 하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마침 출간한 책들이 반응이 좋아 용기를 얻었다. 평소보다 더 집중해 책을 읽었고, 부지런히 사진을 찍으며 다녔다. 지구 곳곳을 여행 다녀와 미친 듯 또 일했다. 그리고 경비를 모아 또다시 떠나곤 했다. 그렇게 10년 넘게 50여 개국을 순례하며, 우리 것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에 새삼 다시 눈뜨게 되었다. 그리고 엄마와 여행을 못 다닌 일이 가슴에 다가왔다. 엄마를 모시고 여행을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는 이미 엄마의 병은 깊어진 상태였다. 다 때가 있어 그 때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더라.

내게 참 슬픈 시절에 엄마가 딸에게 바라던 연애의 온기는 없었다. 하지만 땅과 태양의 온기를 흠뻑 안고 다닐 수 있었던 건 엄마의 유언 때문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살아 숨쉬고 움직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자신이 사랑받고 있는가를 깨달았다. 세상과 대지로부터 받은 사랑을 담은 사진전을 준비하면서, “너도 사랑을 누려라” 엄마의 이 한마디로 내 인생이 바뀌었음을 실감한다.

홀로 남으신 아버지의 말씀도 내 마음의 표지판이 돼 있다. “살아서 남에게 네 사랑을 다 줘라.” 이 말을 기억하며 책 한 권의 인세를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뜻으로 재난방지 기금으로 기부했다. 누군가의 한마디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하니 얼마나 생은 경이롭고 신비로운가. 지난봄 엄마 산소에 꽃 심으러 갔다가 나는 이렇게 인사드렸다. “엄마, 그놈의 사랑은 짝 나타나면 누릴게. 그래도 여행과 연애하며 뜻깊은 추억의 오두막이라도 얻었으니 기뻐해줘.”


신현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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