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전우영의 영화와 심리학]삶이 좀비 같다면, 일단 따뜻한 온도로 가슴을 녹여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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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3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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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웜 바디스’의 사랑이라는 전염병

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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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다. 오늘도 어제처럼 느낌 없는 하루가 시작됐다. 새로운 시작이 주는 설렘은 사라진 지 오래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마셔도 소용없다. 진한 에스프레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제 저녁에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그 정도면 잠도 많이 잤다. 그런데도 감각을 잃어버린 것 같은 상태가 하루 종일 지속된다. 이런 상태에서도 주어진 일들을 꾸역꾸역 처리하고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어쩌면 똑같은 일을 매일 반복하고 있으니 그럴 수 있는지도 모르지만. 주위 사람들은 내가 얼이 빠진 상태로 기계적으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들 역시 나와 비슷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나도 혹시 좀비가 아닐까


가끔 멍한 상태로 주어진 일상의 터널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 그때마다 드는 생각. 좀비가 이런 게 아닐까. 나는 겉은 멀쩡해도 실제로는 좀비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좀비가 뭔가. 살아 움직이는 시체가 아닌가. 좀비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움직이고, 그르렁거리는 이상한 소리를 낼 수 있다는 면에서 살아 있다. 하지만 기쁨, 슬픔, 사랑 같은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서 죽어 있다. 신체는 살아 있지만 영혼 또는 마음이 죽어버린 존재인 것이다. 초점 잃은 눈으로 무거운 몸을 가까스로 끌고 다니면서 목적 없이 떼로 몰려다니는 인생. 가끔 먹잇감을 발견하면 앞뒤 안 돌아보고 달려드는 그런 삶. 좀비의 이런 모습은 영혼 없는 일상을 영위하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무감각한 일상을 깨우는 가장 흥미진진한 사건은 사랑이다. 그래서 좀비처럼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간절히 원하게 되는 것이 사랑인지도 모른다. 무기력한 일상이 반복될수록 열정적인 사랑에 대한 욕구는 점점 커진다. 사랑만이 우리를 깨워줄 유일한 구원자처럼 여겨진다. 좀비 같은 인생에 사랑이 ‘수혈’된다면 무감각했던 일상에도 따뜻한 피가 다시 돌지도 모른다.

조너선 러빈 감독의 2013년 작 ‘웜 바디스’는 바로 사랑으로 구원받는 좀비들의 이야기다. 폐허가 된 공항에서 무기력한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 좀비들. 아르(R·니컬러스 홀트)도 그중 한 명이다. 다른 좀비들보다 젊고 잘생겼지만, 그도 배가 고프면 산 사람의 살과 내장을 뜯어먹어야 한다. 그의 몸에서는 좀비 특유의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입가에는 사람의 피가 묻어 있다.

심장을 뛰게 한 사랑

다른 좀비들과 인간 사냥에 나선 R. 그는 인간인 줄리(테레사 팔머)를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먹잇감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것은 좀비에게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멈춰있던 그의 심장은 줄리를 보자마자 다시 뛰기 시작한다. 좀비와 인간의 사랑은 이렇게 시작한다. R는 줄리를 다른 좀비들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자신의 숙소로 그녀를 피신시킨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철천지원수 사이인 두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도 사랑을 키워간 것처럼, R와 줄리는 좀비와 인간의 공격과 방해에도 둘의 사랑을 지켜낸다. ‘웜 바디스’는 좀비 로미오와 인간 줄리엣의 러브스토리인 셈이다.

R의 사랑은 심장의 두근거림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사랑을 완성하는 것은 줄리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날 사냥에서 R는 페리(데이브 프랑코)라는 사내를 죽이고 그의 뇌를 꺼내 먹는다. 다 먹지 못하고 남은 페리의 뇌를 집으로 싸가지고 와서 가끔 생각날 때마다 먹는다. 죽은 사람의 뇌를 먹으면 그 사람의 기억을 경험하게 되는 좀비. R는 페리의 뇌를 먹을 때마다 페리의 기억 속에 저장된 추억을 경험한다. 페리는 다름 아닌 줄리의 남자친구. R는 페리의 뇌를 통해 줄리와의 행복했던 시절에 대한 추억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덕분에 사랑의 감정은 더 깊어지고 풍부해진다. 사랑에 빠지면 빠질수록 R의 몸에는 따뜻한 피가 온몸 구석구석까지 돌기 시작한다. 그의 몸은 점점 따뜻해진다.

급기야 R와 줄리의 사랑을 목격한 다른 좀비들도 사랑에 감염되기 시작한다. R의 친구 엠(M·롭 코드리)의 심장도 손을 잡고 있는 연인의 사진을 본 후에 갑자기 뛰기 시작한다. 이 사진을 본 다른 좀비들의 심장에도 ‘불’이 들어온다. 좀비들 사이에 사랑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 좀비들의 몸은 점점 따뜻해진다. 사랑이라는 전염병 덕분에 좀비들은 따뜻한 피가 도는 인간으로 변해간다.

물리적 따뜻함, 심리적 따뜻함

좀비 같은 인생을 살고 있을 때 꿈에도 그리던 사랑이 “짠” 하고 나타나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영화처럼 훈훈하지 않다. 사람들은 좀비 같은 이에게 자신의 관심과 사랑을 내주지 않는다. 사랑을 받으려면 좀비의 상태에서 스스로 벗어나야만 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을 때 “옆구리가 시리다”고 말하곤 한다. 이 말은 단지 은유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일까. 최근 연구들은 혼자라는 느낌이 들 때 사람들이 실제 추위를 느낀다는 것을 보여준다. 캐나다 토론토대의 천보 중과 제프리 레오나르델리는 2008년 ‘심리과학’이란 학술지에 발표한 연구에서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배척당하면 실내온도를 실제보다 낮게 지각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혼자라는 생각이 방이 춥다고 느끼게 만든 것이다.

같은 연구에서 사회적 배척을 경험한 사람들은 뜨거운 음식이나 음료를 먹고 싶은 욕구를 더 크게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얼음이 들어간 차가운 콜라보다는 뜨거운 커피나 수프에 대한 갈망이 커진 것이다. 이것은 외로움이 유발한 차가움을 뜨거운 음식을 통해서 완화하려는 무의식적인 노력 때문이다.

미국 예일대의 존 바지와 이디트 샤레브는 2011년 학술지 ‘감정’에 “외로움을 더 크게 느끼는 사람일수록 일상생활에서 뜨거운 물로 목욕을 더 자주, 더 오랫동안 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물리적인 따뜻함은 실제로 외로움을 완화해 주는 효과가 있다. 물리적인 따뜻함(차가움)과 심리적인 따뜻함(차가움)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매우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그 덕분에 물리적인 따뜻함이 심리적인 따뜻함을 유도할 수 있는 것이다. 좀비 같은 인생으로부터 당신을 구원해 줄 로미오나 줄리엣이 계속 나타나지 않는가. 그렇다면 한 번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보면 어떨까.

전우영 충남대 교수(심리학) wooyoung@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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