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김화성 전문기자의&joy]해남 달마산 미황사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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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3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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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잔등에 서니 한쪽은 연두바다, 한쪽은 파릇파릇 보리벌판

미황사 대웅전 앞마당에 봄기운이 가득하다. 새물내가 물씬 난다. 갓 빨래한 새 옷 냄새가 새록새록 우러난다. 화장기 없는 대웅전은 곱게 늙은 누님 같다. 뒷산 동백나무숲엔 앙증맞은 동백꽃이 하나둘 붉게 피어나고 있다. 산비둘기 구구거리는 소리가 아득하다. 우뚝우뚝 솟은 달마산에는 아지랑이가 하롱하롱 꼬물꼬물 올라간다. 달마산 잔등에 오르면 한편에선 남해바다가 울렁이고, 다른 한편에선 기름진 해남들판이 자글자글 끓는다. 지금 땅끝은 봄이 참 달다. 해남=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미황사 대웅전 앞마당에 봄기운이 가득하다. 새물내가 물씬 난다. 갓 빨래한 새 옷 냄새가 새록새록 우러난다. 화장기 없는 대웅전은 곱게 늙은 누님 같다. 뒷산 동백나무숲엔 앙증맞은 동백꽃이 하나둘 붉게 피어나고 있다. 산비둘기 구구거리는 소리가 아득하다. 우뚝우뚝 솟은 달마산에는 아지랑이가 하롱하롱 꼬물꼬물 올라간다. 달마산 잔등에 오르면 한편에선 남해바다가 울렁이고, 다른 한편에선 기름진 해남들판이 자글자글 끓는다. 지금 땅끝은 봄이 참 달다. 해남=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봄밤이깊다달마산너머
열나흘 지나 보름 달빛이 능선을 향해 오를수록
산은 한편 눕고 혹은 일어나기를 거듭한다
잊었다는 듯이 잊지 않았다는 듯이
그래 때가 되면 이윽고 가야지
꽃숭어리째 붉은 동백이 긴 봄밤을 끝내 참을 수 없다는 듯
땅바닥에 뚝뚝 목을 내놓는다

미황사까지가 멀다
그때 대웅전에 들며 나는 왜 그 말을 떠올렸을까
미황사를 등 뒤로 발길을 떼어 놓는다
내게 있어 아득히 잡히지 않는 먼 길을 떠올린다
결국 알 수 없는 그곳까지가 멀다 〈박남준 ‘미황사’에서〉

봄은 과연 어디까지 왔을까. 땅끝 달마산 봉우리를 넘어섰을까. 봄꽃의 북상 속도는 하루 20km. 하지만 땅끝마을에도 아직 일러 꽃은 피지 않았다. 달마산(489m)은 한반도의 화강암 꼬리뼈다. 우뚝우뚝 하얀 바윗돌들이 하늘에 주먹질을 하고 있다. 영락없는 ‘작은 금강산’이다.

해남은 한반도의 등뼈가 마지막으로 불끈 치솟아 멍울진 땅이다. 그곳에서 달마산은 남해바다와 나란히 칼금을 내며 등줄기를 뻗고 있다. 팔짱을 낀 채 바닷바람을 막아준다. 산잔등에 오르면 한쪽에선 남해바다가 출렁이고, 또 한쪽에선 해남벌판이 자글자글 끓는다.

손에 잡힐 듯 올망졸망한 섬들이 점점이 횡대로 떠 있다. 어룡도 백일도 흑일도 당일도 장구도 보길도 노화도…. 검정 선(線)과 파랑조각의 ‘몬드리안의 바다’(이흔복 시인)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추상화가 몬드리안(1872∼1944)에게 수평선은 아늑한 어머니의 품안이다. 연둣빛 바다, 연둣빛 아기보리밭, 파릇파릇 마늘밭, 아릿한 푸른 하늘, 바다와 하늘의 아슴아슴한 능선.

‘땅 끝에/왔습니다./살아온 날들도/함께 왔습니다./저녁/파도 소리에/동백꽃 집니다.’ 〈고은 ‘땅끝’〉

천년고찰 미황사는 정갈하다. 새물내가 물씬 난다. 갓 빨래한 새 옷 냄새가 새록새록 우러난다. 절집은 한결같이 단정하다. 반듯하면서도 소박하다. 달마산 앞가슴 반공중에 걸려 있다. 그림 같다. 그냥 보자마자 스르르 ‘절하고 싶고, 무릎 꿇어 입 맞추고 싶다(고정희 시인)’. 어느 스님이 이렇게 예쁘게 절집을 지었을까.

바닷바람은 여전히 칼칼하다. 하지만 바람꽃 속에 부드러운 솜털기운이 있다. 미황사 대웅전 앞마당에서 저물녘 곱게 물든 바다를 보면 마음이 둥글어진다. 푸른 남해바다가 한순간 가슴속에서 일렁인다. 새벽 도량석 목탁소리가 목관악기 음질처럼 따뜻하다. 구구구 산비둘기들도 아침 일찍부터 설쳐댄다. 굶주린 산토끼가 귀를 쫑긋거리며 공양간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달마산 바위틈에 아슬아슬 새집처럼 걸려 있는 도솔암.
달마산 바위틈에 아슬아슬 새집처럼 걸려 있는 도솔암.
도솔암은 달마산 어깻죽지에 새집처럼 매달려 있다. 아슬아슬하다. 한 평 남짓이나 될까. 20여 명이 서면 발 디딜 틈도 없다. 용케도 기암괴석 두 바위틈에 암자를 지었다. 고려 시대에 지은 것이다. 달고 시원한 샘물도 솟는다. 미황사에서 걸어서 1시간쯤 걸린다.

천년숲길을 따라 가다가 표지판을 보고 오르면 닿는다. 도솔암에서 달마산 정상까지는 2시간은 잡아야 한다. 온통 바윗길 능선길이다. 크고 작은 돌들 우두둑 지르밟고 가야 한다. 수시로 밧줄을 잡고 오르내린다. 산 아래 오른쪽은 바다, 왼쪽은 들판이다. 짭조름한 바다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바람은 이미 봄기운으로 터질 듯하다.

‘아아 남자들은 모르리/벌판을 뒤흔드는/저 바람 속에 뛰어들면/가슴 위까지 치솟아 오르네/스커트자락의 상쾌’ 〈황인숙 ‘바람 부는 날이면’〉


▼ ‘미황사 도편수’ 현공 스님, 소걸음으로 건축해 오막살이 절간을 ‘예쁜 절집’으로 ▼

현공 스님(56·사진)은 ‘미황사 도편수’로 불린다. 절집 말로 불사도감(佛事都監)이다. 그는 1989년 미황사에 온 이래 오직 절집 세우고 가꾸는 데만 온 힘을 기울였다. 그의 손때가 묻지 않은 건물이 없을 정도다. 주지 시절(1992∼2000년)이나 회주(會主)인 요즘이나 한결같다. 그가 오기 전까지 미황사는 거의 ‘오막살이 집 한 채’ 수준이었다.

스님은 서두르지 않았다. 대웅전을 손보고, 그 다음에는 명부전을 지었다. 그리고 삼성각, 만하당, 부도암…. 그렇게 하나씩 차근차근 절집을 세웠다. 목재 하나, 대패질 하나 허투루 하지 않았다. 자하루 1층 기둥 32개를 국산 육송으로 쓰기 위해 3년 동안 전국 목재소를 돌아다닐 정도였다. 축대도 절 안에 나뒹구는 돌을 이용해 쌓았다. 그는 한꺼번에 여러 건물을 짓지 않았다. 오직 한 건물에만 최선을 다했고, 그게 끝나야 비로소 다음 건축을 생각했다.

“절집이 예쁘다고요? 글쎄요, 전 그런 생각 없이 그냥 지었을 뿐입니다. 뭐 대단한 뜻이나 계획을 가지고 한 게 아닙니다. 옛날엔 일하는 게 재밌고 힘든 줄을 몰랐습니다. 여러 사람이 뜻을 맞춰 쉬엄쉬엄 하다 보면 어느새 집이 지어지고는 했지요. 요즘엔 사람들이 포클레인 등 기계에 맞춰 일을 하려고 합니다. 도무지 여유가 없어요. 시간에 쫓겨 일을 하다 보니 대충대충 끝내기 일쑤입니다. 전기톱질 하나 제대로 해내는 사람이 없습니다. 먹줄 바깥쪽으로 5mm 정도 여분을 두고 전기톱질을 한 뒤, 나머지는 손 대패질로 맞춰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사람이 드물어요. 결국 안 맞으니 다시 하게 됩니다.”

스님은 체구가 자그마하지만 단단하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뭐든 현장에서 꼼꼼히 살펴보고, 몸으로 직접 겪어본 후 판단을 내린다. 미황사에 대한 이러저러한 전설이나 야담 같은 것도 확대해석하는 것을 꺼린다. 합리적인 불교라야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다는 이유다.

“어영부영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보다는, 좀 퉁명스럽고 고집 세지만 자기 일을 확실하게 하는 사람이 훨씬 낫습니다. 장인정신이랄까 뭐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갈수록 줄어드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다행히 여기 해남사람들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가만히 들어봐서 타당하다고 생각되면 너도나도 자기 일처럼 도와줍니다. 돈과 시간과 기계에 매달려 살지 않습니다. 비록 조금 가난하게 살지는 몰라도 느릿느릿 행복하고 여유롭게 사는 분들입니다. 요즘 정부에서 무슨 지원금이라도 내려오면 언제까지 마쳐야 한다고 기한을 못 박아버립니다. 그러고는 수시로 채근하고 재촉해댑니다. 절집은 세월과 정성으로 짓는 것인데….”

▼ 대웅전 주춧돌에 ‘게’가 새겨져 있는 까닭은 ▼


미황사 대웅전 주춧돌엔 ‘게, 거북이’ 등이 새겨져 있다. 왜 하필 그곳에 바다생물이 새겨져 있을까. 그것은 미황사 창건설화와 관계가 있다.

서기 749년(신라 경덕왕 8년) 돌로 된 배 한 척이 땅끝 사자포구에 와 닿았다. 그 안엔 화엄경 80권, 법화경 7권과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16나한 등 불상이 가득했다.

그때 마침 홀연히 어디선가 검은 소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 소의 잔등에 경전을 실었다. 검은 소는 뚜벅뚜벅 한나절 정도 가더니 어느 한 곳에서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바로 그곳에 미황사를 지어 경전과 불상을 모셨다. 미황사의 ‘美(미)’는 검은 소의 “음메∼”하는 울음소리에서 따온 것이다. ‘黃(황)’은 스님의 꿈에 나타나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불경을 모시라’고 알려준 ‘金人(금인)’의 황금빛을 딴 것이다. 마침 미황사 발치엔 ‘소를 묻은 동네’라는 뜻의 牛墳里(우분리)가 아직도 남아있다.

이 땅의 불교는 과연 어느 곳으로부터 왔을까. 고구려를 통한 대륙 코스일까 아니면 남중국으로부터 뱃길로 온 서해 안쪽 루트일까. 인도로부터 직접 남해안으로 온 흔적도 있다. 미황사가 그 좋은 예다. 대웅전 주춧돌의 ‘게, 거북이’ 그림이 바로 그 증거라는 것이다.

김화성 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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