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도산서원 강회는 정치적 학술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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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2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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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과 지식의 탄생/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실 기획
424쪽·2만5000원·글항아리

겸재 정선(1676∼1759)이 1734년에 그린 도산서원. 글항아리 제공
겸재 정선(1676∼1759)이 1734년에 그린 도산서원. 글항아리 제공

정조 16년(1792년) 영남 지역 선비들은 한양이 아닌 안동 도산에 있는 도산서원에서 과거를 치렀다. 관학이 아니라 사학(私學)인 서원에 과장(科場)이 열린 것이다. 과거에 앞서 정조는 도산서원이 모시는 퇴계 이황(1501∼1570)을 치제(致祭·죽은 신하에게 임금이 내려주는 제사)하게끔 했다.

정조가 이 같은 명을 내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최대의 사림을 보유한 영남 지역에 ‘러브콜’을 보낸 것이다. 실제로 도산서원에서 과거가 열린 지 1개월 만에 사도세자의 신원(伸寃)을 위한 영남 만인소가 나왔다.

이 사실은 퇴계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후인 선조 7년(1574년) 퇴계 문하의 인물들과 유림이 세운 도산서원이 오랫동안 퇴계학의 본거지이자 영남 유교 세력의 중심축 역할을 해왔음을 보여준다.

이 책은 영남 지식문화의 산실인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어떻게 지식이 형성되고 보존, 전파되며 어떤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는지를 다각도로 분석했다. 정만조 국민대 명예교수, 이헌창 고려대 교수, 이수환 영남대 교수, 정순우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김종석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손숙경 동아대 강사가 도선서원의 고서와 고문서 자료를 연구해 집필에 참여했다.

“강한 것이 비록 군자의 덕이기는 하지만 지나치면 포한강분(暴悍强忿)에 이를 수 있다.”

퇴계는 제자인 월천 조목(1524∼1606)이 지나치게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향촌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자 편지를 보내 이처럼 충고했다. 1550년부터 1570년까지 퇴계가 월촌에게 보낸 친필 편지 113통을 묶은 ‘사문수간(師門手簡)’을 통해 당시 퇴계 문하에서 스승과 제자 간의 학문적 논의와 인간적 교류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읽을 수 있다. 서원 건립과 같은 유림 사회의 주요 사안 및 예법의 해석 문제뿐 아니라 양식이 떨어졌을 때 곡식을 보내준다든지 취직을 알아봐주는 사적인 내용도 포함돼 있다. 이 책은 도산서원에 있는 서책 중에서도 가치가 높아 ‘원보(院寶)’로 불린다.

도산서원은 조정이나 다른 사림학파로부터 퇴계학에 대한 질문이나 이견이 나올 때는 강회를 열어 공론을 이끌어냈다. 강회는 정치적 성격도 지녔는데, 정조 19년(1795년) 문체반정(文體反正)에 대한 지침 이후 시행된 을묘강회가 대표적인 예다. 문체반정은 패관, 잡문이나 소설의 문체를 배격하고 순정한 옛 문장으로 환원한다는 정책이었으며 평소 주자의 가르침 이외의 것을 이단으로 배격한 퇴계학의 본산답게 을묘강회는 이를 학술적으로 뒷받침했다. 오늘날 정치집단의 후원을 받는 학술대회와 겹치는 장면이다.

심학(心學)과 이기(理氣), 정학(正學)을 둘러싼 당대 학자 간의 논쟁과 도산서원의 역할에 대해서도 책은 세세히 설명한다. 쉽게 읽히진 않지만 당시 정치 상황을 은밀하게 엿보는 쾌감을 준다. 한 예로 퇴계학의 정통을 계승했다는 평가를 받던 월촌의 학맥이 퇴계학파 내에서 뻗어나가지 못한 이유는 월촌의 정치적 기반이 퇴계 문인의 주축이 된 남인이 아니라 북인에 있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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