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거실 권력 나눴더니 자유가 활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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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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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의 변신 Season 2]<5>방이 거실이 되는 아파트
안방-큰아이방 대신 책방-음악방-뒹구는 방으로 발상 뒤집어

집의 한가운데 거실을 두는 기존 아파트와 달리 거실과 방의 크기를 같게 만들어 그중 어느 방이라도 거실이 될 수 있게 설계했다. 방의 경계에 접이문이나 미닫이문을 달아놓으면 가족 구성원의 변화에 따라 방의 개수와 공간의 크기를 조정해 쓸 수 있다. 위쪽 그림은 부부만 사는 집으로 실내 공간의 대부분을 거실로 꾸몄다. 가운데 그림은 오른쪽 방에 거실을, 아래 그림은 왼쪽에 거실을 둔 집이다. 정현아 DIA건축소장 제공
집의 한가운데 거실을 두는 기존 아파트와 달리 거실과 방의 크기를 같게 만들어 그중 어느 방이라도 거실이 될 수 있게 설계했다. 방의 경계에 접이문이나 미닫이문을 달아놓으면 가족 구성원의 변화에 따라 방의 개수와 공간의 크기를 조정해 쓸 수 있다. 위쪽 그림은 부부만 사는 집으로 실내 공간의 대부분을 거실로 꾸몄다. 가운데 그림은 오른쪽 방에 거실을, 아래 그림은 왼쪽에 거실을 둔 집이다. 정현아 DIA건축소장 제공
#사례1: 드라마 PD인 독신 여성의 집

몇 년 전 사무실로 고객이 찾아왔다. 방송국 PD인 그는 혼자 사는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109m²(약 33평)형 아파트를 수리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집은 20여 년 전 당시 가장 보편적이었던 4인 가족 기준으로 설계된 공간이었다. 집 내부는 부엌 옆의 작은 방까지 포함해 방 4개와 화장실 2개로 잘게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건축주는 침대가 들어가는 방 하나를 제외하고 나머지 공간 전체가 거실 혹은 작업실이 되기를 원했다. 혼자 사는 그에게 집은 집인 동시에 밤샘 작업과 간단한 스태프 회의도 하는 일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 ‘안방’ ‘큰아이방’ ‘작은아이방’ 대신 ‘책 보는 방’ ‘음악 듣는 방’ ‘이야기하는 방’ ‘뒹구는 방’을 제안했다. 방 주인이 아니라 쓰임새에 따라 이름을 붙인, 사실상 모든 방이 거실이 되는 집이다.

#사례2: 유학생 딸을 둔 맞벌이 부부 집


새로 집을 짓겠다며 찾아온 맞벌이 부부는 원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부부는 회사 일이 바쁘다 보니 평일에는 집에서 저녁을 먹는 일이 거의 없다. 중학생 딸이 하나 있지만 영국 유학 중이다. 주말에는 집에서 부부가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들에게 거실은 방보다 훨씬 중요했다. 하지만 집에는 방이 필요 이상으로 많고 거실은 쓰임새보다 좁았다. 부부는 거실이 아주 큰 집을 원했다. 그러면서도 유학 중인 딸이 방학 때 오면 머물 공간이 필요했다.

방학 때 잠시 들르는 딸과 넓은 거실을 원하는 부부를 위해 넓은 공간 하나가 미닫이문으로 나뉘어 필요에 따라 방을 만들어 쓸 수 있는 설계를 제안했다. 다다미방처럼 방과 방이 합쳐져 커다란 거실이 되기도 하고, 또 커다란 거실이 몇 개의 방으로 나뉠 수도 있는 식이다.

#사례3: 3대가 함께 사는 가족의 집

약사인 김모 씨는 아이가 생긴 후로 시댁에 들어가 산다. 3대가 함께 사는 집은 방 4개짜리 48평형 아파트다. 안쪽 방 두 개는 부부 침실로 설계돼 크고, 현관 쪽 방은 자녀 방으로 지어져 작다. 안방을 시부모가 쓰기 때문에 그 맞은편 방을 김 씨 부부가 쓰기는 불편하고, 현관 쪽 방은 부부 침실로는 작다. 지금은 좁아도 부부가 현관 쪽 방을 쓰고 방 하나는 드레스룸으로 했으며, 나머지 하나는 아이들이 쓴다. 딸과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방을 따로 줘야 하는데 그때는 어떻게 방을 나눠야 할지 고민이다.

김 씨에겐 말 못할 고민이 또 하나 있다. 그는 퇴근 후 집에 와도 거실에 나가지 않는다. 이유를 물어보니 시아버지가 늘 거실 소파에 누워 TV를 보기 때문이란다. 김 씨에게 거실은 시아버지의 공간일 뿐이다.

집집마다 거실의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아파트 건물 밖에서 보는 거실창의 위치도 제각각이다. 정현아 DIA건축소장 제공
집집마다 거실의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아파트 건물 밖에서 보는 거실창의 위치도 제각각이다. 정현아 DIA건축소장 제공
우리네 거실은 언제부턴가 TV에 점령당해 ‘TV 채널 선택권’을 가진 사람이 지배하는 공간이 됐다. 사방으로 열린 채 집의 중앙에 커다랗게 자리 잡은 거실 때문에 내 방에 조용히 있고 싶어도 거실의 TV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린다. 행여 손님이라도 오면 방 안에 갇히는 상황이 된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거실은 주방이나 화장실로 갈 때 거치게 되는 거대한 홀이나 복도와 다를 바 없다. 때론 공간도 충분히 폭력적이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이 그런 것처럼 가족의 생활 방식과 다른 집이 그러하다.

지금의 아파트가 쓰임에 따른 유연성이 떨어지는 이유는, 한가운데에 거실이 가장 크게 위치하면서 각 방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가족의 수가 변해도, 부모 세대와 분리가 필요해도, 그동안 거실은 집 한가운데에서 굳건히 그 아성을 지키며 권력을 고수해왔다.

거실이 평면의 중심이 아닐 수 있어야 한다. 거실을 움직여보자. 거실과 방의 크기를 동등하게 만들고, 그중 어느 방이라도 거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 순간, 가족 구성원에 따라 공간을 다양하게 만들 수 있다. 아이가 하나인지 셋인지에 따라, 아이가 갓난아이인지 성장한 대학생인지에 따라, 시부모와 같이 사느냐 아니냐에 따라 적절하게 거실과 방들의 위치를 정할 수 있게 된다. 안방 거실도 가능하고, 문간방 거실, 부엌방 거실도 가능해진다. 또 방들의 크기가 동일해 공간의 위계가 분명치 않을 때는 한 집에 여러 개의 거실을 만들 수도 있다.

더 넓은 거실을 원한다면 한옥을 접목해보자. 한옥은 칸이라는 통합된 시스템 아래 3칸 집에서 99칸 집까지 탄력적으로 지어졌다. 이제 아파트를 한옥의 칸과 같은 체계로 만들자. 그리고 그 칸의 경계를 미닫이문이나 접이문으로 하자. 방의 시스템이 통일되고 방의 경계가 가변적이 된다면, 사용자가 쓰임에 따라 방의 크기를 정하고 방의 개수를 조절할 수 있게 된다. 사용자가 스스로 규정하는 공간의 확장과 분리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나는 집 가운데 거실이 없는 아파트, 방이 거실이 되는 아파트를 꿈꾼다. 거실은 방과 방 사이의 거리를 정하면서 가족 구성원 간의 분리와 통합 방식을 결정한다. 거실의 위치를 자유롭게 함으로써 방과 방 사이의 관계가 집마다 새롭게 정의되는 아파트를 상상한다.

또 방들의 위계가 지금처럼 그 크기의 차이로 정해지는 게 아니라, 각각의 방이 공간의 성격에 따라서 또 다른 방들과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서 집 전체 속에서 역할을 스스로 규정하는 아파트를 생각한다. 거실이 자유로워지면, 아파트가 자유로워진다.

※본보에 소개된 아파트 설계 아이디어와 이미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 필자 명단

서현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 ②조남호 솔토건축소장 ③황두진 황두진건축소장 ④김광수 이화여대 건축학부 교수 ⑤정현아 DIA건축소장 ⑥김찬중 THE_SYSTEM LAB 소장 ⑦안기현 이민수 Ani_스튜디오 공동소장 ⑧장윤규 국민대 건축대학 교수·운생동 건축 대표 ⑨임재용 OCA건축소장 ⑩양수인 삶것(lifethings)소장

정현아 DIA건축소장 diaseoul@gmail.com
#아파트#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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