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최고를 꿈꾸던 천재소녀 ‘가족’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9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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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을 바꾼 순간- 피아니스트 서혜경의 서른 즈음

인간의 심장박동과 음악의 안단테 빠르기가 거의 같다고 한다. 피아니스트 서혜경은 유방암과 우울증을 이겨내고 있는 자신의 연주가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
는다. 하루라도 연습을 쉬면 불안해진다는 그는 15일 성남문화센터에서 리사이틀을 연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인간의 심장박동과 음악의 안단테 빠르기가 거의 같다고 한다. 피아니스트 서혜경은 유방암과 우울증을 이겨내고 있는 자신의 연주가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 는다. 하루라도 연습을 쉬면 불안해진다는 그는 15일 성남문화센터에서 리사이틀을 연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 “환갑잔치를 해주세요.” 우리 나이로 서른 살이 된 서혜경(피아니스트)은 생일을 앞두고 한국에 와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동안 누구보다 2, 3배 더 노력했으니 30세 생일을 회갑연처럼 크게 치러도 된다고 여겼다. 바로 그 전해인 1988년 미국 카네기홀은 그를 ‘올해의 3대 피아니스트’로 꼽았다.

미 공영방송 PBS가 그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지만 쳐다보지도 않았다. 모든 게 허망했다.

오랜 해외 연주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뉴욕 아파트의 시큼한 곰팡내가 싫었다. 전기료 낼 기간을 넘겨 불이 안 켜지는 깜깜한 방에서 홀로 외로웠다. 가족과 함께 미역국을 먹는 그런 자리가 그리웠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가족의 자랑으로서만이 아니라 딸로서 사랑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서른 번째 생일은 아버지 지인의 승진 축하연과 겸상이 됐다. ‘나만의 가족이 필요해.’ 그는 생각했다. 》
○ 남자의 인생을 살겠다

서혜경은 ‘서석봉’이었다. “너는 글을 쓰거라. 나는 떡을 썰겠으니.” 한석봉의 어머니가 호롱불을 끄며 아들에게 주문했듯이, 그의 어머니는 방의 전등을 끄고 딸에게 피아노를 치게 했다. 2남 3녀 중 장녀인 그의 재능을 일찌감치 파악한 어머니는 초등학생 딸을 완벽하게 조련하고자 했다. 자수성가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지런했다. 오전 5시면 종을 울려 자녀들의 잠을 깨웠다. 북한의 ‘새벽별 보기 운동’을 다룬 만화를 본 어린 서혜경이 ‘이거 내 이야기네’라고 할 정도였다. 딸이 연습을 소홀히 할까 봐 어머니는 그를 가끔 집 3층 방에 가둬 놓기도 했다.

“엄마는 내가 연습하는 내내 서서 지켜보느라 다리가 퉁퉁 붓기도 했어요. 자신의 생활을 희생하면서 제 코치 역할을 하셨죠.”

보수적인 아버지는 장녀가 그저 명문 여대 피아노과에 갈 정도만 하기를 바랐다. 피아노 유학 같은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외국 나가면) 여자 팔자만 드세진다”고 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오기가 생겼다. 아버지를 설득하고 싶었다. 보란 듯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시상을 하던 ‘5·16민족상’의 음악상 피아노 부문에서 2년 연속 수상했다. 당시 그 상을 받으면 유학 비자를 내줬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했다.

그즈음 10대 초반의 그는 남자의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했다. “제사 때나 이럴 때 보니까 여자들은 똑같은 학벌을 가지고 있어도 뼈 빠지게 일하고 남자들은 놀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남자다’라고 결심을 했어요.” 아버지에게 받았던 ‘박대’도 가슴에 걸렸다. 아버지는 장녀인 그보다는 아들인 셋째, 넷째만 싸고돌았다. “그게 한이 맺혔어요. 나도 출세해 보겠다. 세계 정상이 돼보겠다. 그랬죠.”

더욱 독하게 피아노에 매진했다. 남들이 연습할 때는 물론이고 남들이 쉴 적에도 연습했다. ‘천재소녀’라는 말을 들으며 중학교 2학년 나이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 얼마 뒤 미국으로 옮겨서 본격적인 피아노 수업을 받았다. 그러던 10대 후반, “천재 소리 들으면서 세계적인 연주자가 된다더니…. 만 20세 전에 세계적인 업적이 없으면 시집이나 보내겠다”는 아버지의 말을 들었다. 정말로 비행기로 날아와 자신을 끌고 갈 아버지였다.

스무 살에 세계적 권위의 이탈리아 부소니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아시아 여성으로는 최초이자 최연소로 최고상을 받았다. 1985년에는 바이올린의 대가 아이작 스턴의 추천으로 세계적 매니지먼트 회사인 ICM과 전속 계약을 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각국 유수의 교향악단과 협연했고 숨 돌릴 틈 없는 독주회 일정이 이어졌다. 세계적으로 ‘서혜경’이라는 이름 석 자를 날렸다. 그런데, 행복하지가 않았다. 서른 즈음이었다.

○ 모든 걸 가질 수는 있다. 단….

다들 미쳤다고 했다. 어떻게 올라선 정상의 무대인데 내려오려 하느냐고 했다. 그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겠다고, 그것도 예쁜 딸과 잘생긴 아들을 하나씩 낳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모두 그랬다. 이 세상 누구보다 피아노를 잘 치고 싶었던 꿈을 어느 정도 이뤘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가 희생했어야 한 것들을 사람들은 잘 몰랐다.

“내게는 유년기, 청년기의 삶이 없었어요. 피아노밖에는. 내가 원하던 세계에 도착하고 보니까 너무 기가 막히고 허무하고…. 내 남동생들은 벌써 가정을 꾸리고 애도 셋이나 되는데 나는 외국에서 혼자 뭐하는 거지, 그랬지요.”

20대에 재주를 떨치고 명성을 얻고 정신없이 바빴다. 연주 여행은 극심한 스트레스였다. 몸은 비쩍 말라갔다. 어찌됐든 일단 해내야 하는 과제였다. 음악을 사랑하느냐 마느냐를 생각할 겨를이나 경황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이룬 성취가 곧 행복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성취는 성취였을 뿐이었다. 이제 더이상 ‘남자’로 살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원했다. 가족이 필요했다. 물론 가족을 갖는다는 것과 성공을 유지한다는 건 양립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성공한 여성들의 전기를 많이 읽었다. 할리우드 영화배우 캐서린 헵번은 동료 남자배우 스펜서 트레이시와 세기의 사랑을 했지만 둘이 동거한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서혜경도 서른이 되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목표를 이루려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고. 이것은 그의 부모님의 철학이기도 했다. 하지만 서른이 지나고 생각이 바뀌었다. “모든 걸 가질 수 있어요. 단, 한꺼번에는 아니라는 것이죠.”

서른셋에 딸을, 서른일곱에 아들을 낳았다. 아이들이 최우선이었다. 젖먹이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연습장에서, 공연장에서 젖을 먹였다. 아이들을 돌보는 데 전력을 다하기 위해 공연을 줄였고, 동선은 예전처럼 넓지 않았다. 미디어와의 대면도 자제했다. 자연히 세계무대에서 그의 이름은 잦아들었다. 물론 꾸준히 연습하고 실력을 가다듬는 데 소홀히 한 적은 없었지만 공백은 공백이었다. 그는 명성 대신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선택했다. 희생이 아니었다. 모든 걸 한꺼번에 다 가질 수는 없었다. “그게 현실인데 어떡해요. 싫지만 받아들여야지. 결혼도 못 하고 애도 못 낳고 할머니가 되기는 싫었어요.”

10년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연주, 연구, 연습의 ‘3연’ 생활이 반복됐다. 앞서가는 세계수준을 다시 따라잡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었다. 자신이 원하는 소리가 나온다며 내심 흐뭇해하던 2006년, 불청객이 찾아왔다.

○ 서혜경은 피아니스트

올해 6월 어느 날, 오전 3시경 우울증이 도졌다. 뉴욕의 호수공원을 40분 동안 뛰었다. 2006년 느닷없이 닥친 유방암 판정과 수술, 그리고 30차례가 넘는 항암치료. 그렇게 보낸 1년 반의 뒤끝에 우울증이 엄습했다. 그가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병원 의사들은 피아노를 계속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 그를 바보 취급했다. 그렇게 혹독하게 그를 연습시켰던 어머니도 “우리 딸 혜경이만 살면 된다”고 했지만 그는 아니었다. “나는 나를 누구보다도 잘 알죠. 서혜경은 피아니스트 서혜경으로 살지 않으면 죽은 사람이에요.”

암에 이은 우울증의 고통은 심했다. 그의 주치의는 약을 처방해줬지만 그는 피아노로 극복하기로 했다. 청중에게서 “과연 서혜경이야”라는 말을 듣기 위해 악착같이 악보에 매달렸다. “내 자존심 때문에 ‘서혜경 한물갔다’는 소리는 죽어도 듣기 싫었거든요.” 주위 사람들은 무리라고 했지만 그냥 밀고 나가서 다시 무대에 섰다.

하지만 우울증은 한도 끝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손을 뻗어보지만 그저 물속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정신적으로 뭔가 잡고 매달릴 것을 찾다 찾은 것이 연습이었다. 1시간 반 정도의 곡을 연습하면 외워야 할 음표가 5만∼6만 개가 된다. 200자 원고지로 약 300쪽 분량이다. 외우기가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음표에 집중하다 보면 그야말로 정신이 없다. 그렇게 어려운 일을 해낸 성취감이 그가 우울증을 막아내는 방패인 셈이다.

어렸을 적부터 피아니스트로서 그의 꿈은 전설적인 음반을 남기는 것이었다. 그는 2년 전 세계 여성 연주자로서는 최초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콘체르토 전집을 녹음했다. 최근 그는 조금씩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마음만 먹으면 만들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연주를 사랑하고 즐기는 경지에 한 발을 디딘 셈이라고나 할까. 물론 언제 어느 때 우울증이 엄습할지 불안하기도 하다. 지독히 힘들게 음표를 외워야 좋은 음악이 나온다는 걸 알기 때문에 매일 절망하기도 한다.

그의 목표는 99세가 되어도 악보를 외워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다. 나이를 먹더라도 얼마든지 뇌의 역량을 새롭게 개발할 수 있으며 따라서 기억력은 쇠퇴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어느 시인이 ‘서른, 잔치는 끝났다’고 했던 그 서른에 그는 인간적인 행복을 찾았다. 그의 예순은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지 괜스레 보고 싶어졌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서혜경#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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