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두 청춘의 무작정 유럽축구 기행]<5·끝> 아스널-풀럼 런던더비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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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생생한 접전, 축구를 보·기보다 느·꼈·다

소년은 아스널의 전설을 보며 꿈을 키운다. 아스널 홈구장인 에미리트스타디움 외벽에 포효하는 티에리 앙리의 사진과 찬사의 글이 붙어 있다. 조영래 우승호 씨 제공 장비 협조=라푸마
소년은 아스널의 전설을 보며 꿈을 키운다. 아스널 홈구장인 에미리트스타디움 외벽에 포효하는 티에리 앙리의 사진과 찬사의 글이 붙어 있다. 조영래 우승호 씨 제공 장비 협조=라푸마
런던이 연고지인 프로스포츠 팀 중 가장 많은 팬을 가진 곳은 어디일까?

런던에만 무려 14개의 프로축구팀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생긴 의문이었다. 몇몇 강팀들이 떠오르긴 하지만 좀 더 신중해야 할 것 같았다. ‘아내는 바꿔도 응원하는 팀은 바꾸지 않는다’란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축구에 관한 한 영국인들은 꽤 고집스럽기 때문이다. ‘이기는 편 우리 편’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궁금하지만 공식적인 통계를 끝내 찾을 수 없었다.

○ 예매표가 없다 ㅠㅠ

런던에 도착한 주말. 첼시가 홈에서 리버풀을 맞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스널과 더불어 소위 ‘빅4’를 구성하는 두 팀이라 경기 전부터 관심이 쏠렸다. 리버풀에서 첼시로 이적한 스페인 국가대표 공격수 토레스 때문에 영국에선 ‘토레스 더비’란 말이 나오기도 했다. 첼시의 스탬퍼드브리지 경기장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해러즈 백화점에서 남서쪽으로 30분 정도 걸으면 나온다. 경기장으로 가는 길목에서 재미삼아 암표상에게 가격을 물어봤더니 150파운드(약 26만5000원·원래 정가는 50파운드)란다.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일찌감치 근처 펍으로 발길을 돌렸다.

유독 사람이 많이 몰려 있는 펍을 발견해 들어가려고 하자 덩치 큰 경비요원들이 막아섰다. 리버풀 팬들과의 마찰을 막기 위해 첼시 팬임을 증명해야 입장이 가능하단다. 외국인이어서일까, 빨간 옷(리버풀을 상징)을 입지 않아서였을까. 경비요원이 잠시 고민하더니 입장을 허락했다.

영국 여행을 하면서 한 번쯤 펍에서 축구를 보는 것은 좋은 경험이다. 그러나 펍을 정말로 ‘잘’ 선택하기 바란다. 우리가 들어간 펍은 사람만 많았지 다들 너무나 얌전(?)했다. 선수들이 잘하면 가볍게 손뼉을 쳤고 실수를 해도 짧게 탄식할 뿐이었다. 경기에 져도 소리를 지르거나 흥분하는 사람 하나 없었다. 반대로 경비요원이 없어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펍을 가보면 어땠을까. 보안상의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흥미진진하지 않았을까 싶다.

미적지근한 펍을 경험한 탓에 아스널과 풀럼의 경기는 꼭 경기장에서 보기로 했다. 우선 아스널 홈페이지에서 온라인 구매를 시도해봤지만 매진이었다. ‘Ticket Exchange’(표 구매 후 사정이 생겨 경기를 못 보는 회원이 다른 회원에게 정가에 표를 되팔 수 있도록 아스널 구단이 만들어 놓은 온라인 시스템)에는 표가 남아 있었지만 유료 회원이어야 거래를 할 수 있었다. 당일 현장 판매분이 남아 있기를 기대해볼 수밖에 없었다.

○ 100파운드짜리밖에 없단다

첼시 홈구장인 스탬퍼드브리지 주변 펍에서 팬들이 경기 전 맥주를 들이켜고 있다.
첼시 홈구장인 스탬퍼드브리지 주변 펍에서 팬들이 경기 전 맥주를 들이켜고 있다.
경기 당일, 경기가 시작되기 3시간 전에 일찌감치 매표소를 찾았다. 하지만 100파운드(약 17만6000원)짜리 표만 남아 있었다. 비싼 표라 그런지 많은 사람이 발길을 돌렸다. 매진될 일은 없겠다 싶어 잠시 표 사는 일을 접어두고 아스널의 홈구장인 에미리트 스타디움을 돌아봤다.

영화 ‘피버피치’(1997년)를 보면 아스널 팬인 주인공이 경기장 근처로 이사하는 내용이 나온다. 영화를 보면서 ‘저렇게까지 좋을까?’ 의아했는데 에미리트 스타디움을 한 바퀴 돌고 나니 조금은 이해가 갔다. 아스널은 다른 어떤 구단보다도 팬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많이 마련해 놓았다. 경기장 한쪽 바닥에는 팬들의 이름과 짧은 코멘트가 새겨진 대리석이 깔려 있는데 곳곳에서 ‘영원히(Forever)’란 단어가 눈에 띄었다. 경기장 주변을 둘러싼 조명에는 125년 구단 역사와 함께한 팬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25년 동안 경기장에서 프로그램 책자를 판매한 한 노인은 본인의 중간 이름으로 아스널의 영웅인 ‘데니스 베르흐캄프’를 추가했다고 했다. 태어날 때부터 아스널 팬인 꼬마 아이도 있었다. 아스널의 ‘광팬’인 아버지가 딸의 중간 이름을 아스널 팬을 지칭하는 ‘Gooner’(팀의 별명인 Gunners에서 온 말)로 지은 것이다. 이쯤 되면 아스널의 모토인 ‘Victoria Concordia Crescit’(‘화합에 의한 승리’란 뜻의 라틴어)가 예사말로 들리지 않는다. 그깟 이사쯤이야. 시끄러운 경기장 근처 집값이 오히려 더 비쌀지도 모를 일이다.

○ 한국인에게 ‘낚인’ 암표상

경기 시간이 다가왔지만 선뜻 표를 살 수 없었다. 최후 수단으로 경기가 시작되면 가격이 내려가는 암표를 노리기로 했다. 예상대로 경기가 시작되자 암표상들이 몰려들었다. 이제는 경찰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80파운드에서 시작된 표 값이 금세 정가인 50파운드 언저리까지 떨어졌다. 우리말로 작전회의를 좀 했더니 암표상이 ‘영어로 해(Speak English)!’라고 버럭 소리치며 조바심을 냈다. ‘걸려들었구나.’ 결국 40파운드에 표를 샀다.

표를 손에 넣고 단 1초라도 더 경기를 보기 위해서 달리고 또 달렸다. 선수들만큼이나 땀을 흘렸나 보다. 좌석은 최고였다. 최신 시설을 자랑하는 경기장답게 선수들의 동작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 과장을 더하면 축구를 ‘보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었다.

하프타임 시간엔 장내 아나운서가 라디오 DJ처럼 팬들의 사연을 소개해줬다. 한 러시아인은 우리처럼 에미리트 스타디움을 처음 방문했다고 했다. 생일을 맞은 한 올드팬에게는 다 같이 축하 박수를 쳐줬다. 장내 방송을 통해 청혼한 남성팬도 있었다. 하이라이트는 아르센 벵게 감독의 행운번호 발표였다. 경제학 석사 학위까지 받은 벵게 감독은 행운번호 추첨이 가져오는 경제학적 효과를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경기는 아스널 수비수의 자살골 때문에 더 흥미진진해졌다. 런던 라이벌인 풀럼에 패한다면 아스널 팬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가 남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흥분한 팬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선수들도 만회골을 넣으려 안간힘을 썼다. 우리도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박주영 선수가 교체 출전해 동점 골, 나아가 역전 골까지 넣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가슴을 설레게 했다. 마지막 교체 선수로 샤마크가 그라운드를 밟을 때 야유를 보낸 아스널 팬은 우리뿐이었을 것이다. 경기장에 늦게 들어간 탓에 박 선수가 대기명단에 없었다는 사실을 경기 후에야 알게 됐다.

경기는 자살골을 넣은 아스널 선수의 동점골 덕분에 1-1로 끝났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경기장을 나서다가 한쪽 벽면에서 ‘Hat-Trick Heroes’라는 문구를 발견했다. 해트트릭을 기록한 역대 아스널 선수들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역시 ‘킹 앙리’라고 불렸던 앙리가 가장 높은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곧 박주영 선수의 이름이 새겨질 빈자리의 먼지를 털어냈다.

이날은 75일 유럽축구기행의 마지막 밤이었다.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좀 더 극적인 상상이 필요한 밤이기도 했다.(공식 집계는 아니지만 아스널도 첼시도 아닌 토트넘 홋스퍼가 런던에서 가장 많은 팬을 보유한 팀으로 통한다고 한다)

런던=조영래 우승호 cyr@naver.com  

지금까지 ‘두 청춘의 무작정 유럽축구기행’을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조영래 씨와 우승호 씨는 75일 동안의 유럽축구기행을 무사히 마치고 1일 귀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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