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 차 한 잔]‘우리가 아는 미국은 없다’ 경북대 김광기 교수

  • Array
  • 입력 2011년 9월 10일 03시 00분


코멘트

“암울한 美 미래가 닭 키우는 뉴요커 낳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에선 병아리 부화회사가 성업 중이다. 집에서 가축을 길러 잡아먹는 문화가 사라졌던 미국인들이지만 경기침체로 주머니 사정이 나빠지자 집집마다 닭을 기르기 시작한 것이다. 300달러를 들여 닭장을 만들어 닭을 키우는 주민이 뉴욕부터 시카고의 교외, 서부에 이르기까지 미국 전역을 휩쓸고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여기저기 닭 울음소리에 밤잠을 설친 주민들이 민원을 제기하자 로스앤젤레스 시의회는 집에서 키울 수 있는 수탉을 한 마리로 제한하는 조례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경제위기 속에서 총기류와 닭장이 많이 팔리는 것은 미국인의 심리적 물질적 불안감이 표출된 겁니다. 정상적인 교환경제 사회의 그물망이 해체되고 타인의 도움을 유기적으로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립 생존전략이죠.”

김광기 경북대 교수는 미국 보스턴대에서 7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중견 사회학자다. 그가 위기에 빠진 미국을 경제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우리가 아는 미국은 없다’(동아시아)를 펴냈다. 2008년 금융위기에 이어 올해 재정위기로 신용등급 강등사태까지 맞은 미국인의 일상생활 변화는 충격적이다.

김광기 교수는 “미국은 원래 정당하게 돈을 버는 부자를 존경해왔지만 월가의 천문학적 보너스가 상징하는 승자독식, 탐욕주의가 만연하면서 사회적 가치가 무너지고 있다”고 말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김광기 교수는 “미국은 원래 정당하게 돈을 버는 부자를 존경해왔지만 월가의 천문학적 보너스가 상징하는 승자독식, 탐욕주의가 만연하면서 사회적 가치가 무너지고 있다”고 말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김 교수는 “미국이 경기침체에 크게 흔들리는 이유는 가계부터 국가까지 만연한 ‘가불(假拂)경제’ 때문”이라고 말한다. 서민이나 중산층 또는 고소득층, 주정부, 연방정부 가릴 것 없이 미래의 소득을 상정하고 몇 배를 당겨서 소비했는데, 불경기로 임금이 줄거나 해고를 당하면 아무런 대책 없이 길거리로 나앉게 된다는 것. 저축이 없는 미국인들에게 실업은 곧 빈곤층 전락을 의미한다.

“가불경제는 100원이 생기면 100원을 쓰는 게 아니라 앞으로 100원이 생길 것을 염두에 두고 미리 300원, 400원을 쓰는 겁니다. 생활의 기반인 직장만 있다면 은행에서 돈을 빌려 자신의 능력으로 살 수 있는 집보다 더 큰 집, 더 좋은 차, 풀장, 그리고 별장과 요트, 심지어 자가용 비행기까지 소유하려 들지요. 그래야 세금 환급으로 빼앗기는 액수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다수가 내일은 없고 오직 오늘만 있다는 심정으로 악착같이 소비하면서 살아왔어요. 이런 삶의 정점이 2000년대 이후 부동산 거품이었습니다.”

청산 직전에 몰린 주정부의 재정상황도 심각하다. 미국을 동서남북으로 관통하던 아스팔트 고속도로를 비용이 적게 드는 자갈로 대체하느라 파헤치고 있다. 교사들에 대한 대량해고로 학년이 다른 학생들이 합반 수업을 하는가 하면, 학부모들의 자원봉사로 수업을 이끌어가기도 한다. 각 주는 넘쳐나는 노숙인들에게 편도 항공권을 주며 다른 주로 내쫓고 있다.

미국 몰락의 초점을 김 교수는 사회학적 원인에서 찾는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기초한 정직과 신뢰, 아메리칸 드림 등 불과 2세기 만에 미국을 최강대국으로 만들었던 사회적 습속과 문화가치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게 더 큰 문제라는 분석이다.

“사회학자인 애덤 셀리그먼은 현대사회를 유지하는 기반은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맺어진 ‘확신(confidence)’뿐 아니라 낯선 사람들에게도 믿음을 유지해 주는 ‘신뢰(trust)’라고 말했어요. 미국은 신뢰를 바탕으로 다인종사회를 공정하고 투명하게 유지해 왔는데 그게 무너지면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빠져들게 되죠.”

300달러를 들여 닭장을 만들고 닭을 키우는 뉴욕 시민. 동아시아 제공
300달러를 들여 닭장을 만들고 닭을 키우는 뉴욕 시민. 동아시아 제공
책은 렌터카의 기름 대신에 물을 채워 반납하거나 여분 바퀴를 훔치는 사소한 도덕불감증부터 미국의 정치 사회 경제에 만연한 도덕적 해이를 보여 준다. 미국도 급속하게 학벌 위주 사회로 변모하고 있으며, 명문 학교 입시를 위한 사교육시장도 커져간다. 고교마다 수석졸업생이 30명씩 배출되는 등 학교장 추천서도 더는 믿을 수 없게 됐다. 서민층부터 고소득층까지 빚을 갚지 않기 위한 ‘전략적 빚 체납’으로 수많은 은행이 쓰러진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도 월가와 정부의 정경유착은 더욱 심해진다. 정치권과의 유착이 심한 골드만삭스에 빗대 ‘정부 삭스(government Sachs)’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김 교수는 “미국이 사회적 가치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현재의 위기는 긴 터널이 아니라 출구 없는 동굴이 될 것”이라고 진단한다.

한편으로 이 책은 우리나라를 향한 성찰로도 읽힌다. 정경유착, 부정부패, 양극화, 집단 이기주의, 정치인들의 포퓰리즘 정책, 지방정부의 무책임함, 교육비리, 도덕 불감증 등이 ‘유사 미국(Pseudo-America)’이라고 할 만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요즘 우리나라에서 사회 이슈화되는 복지문제에 미국의 주정부 재정악화 사태는 반면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