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한줄]만화 ‘진격의 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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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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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세상은 지옥이야… 하지만, 진흙탕서도 연꽃은 핀다

《 “평생 벽 안에서 나가지 못하더라도 살아갈 수 있어. 하지만 그건 마치, 가축 같잖아.”

―만화 ‘진격의 거인’ 중에서

고백한다.

달랑 한 편 쓴 만화 칼럼. 그걸 갖고 거들먹거렸던 술자리. 난 ‘영혼’을 팔았다.

“만화 소재로 쓴다며? 그럼 ‘진격의 거인’ 어때. 죽이던데.”

“맞아. 최근 본 것 중 최고더라.”

뭔 거인? 듣도 보도 못했다. 하지만 기어이 발동한 허세.

“그거…. 괜찮지. 안 그래도 생각하고 있었어.”

몰랐다. 거인이 왜 진격하는지. 다음 날 인터넷에도 ‘거인의 행진’만 쳐댔더랬다. 젊음의 행진도 멈췄는데. 이놈의 ‘가오(かお·얼굴, 체면)니즘’은 언제쯤 사그라질지. 민망하고 민망하다.

‘진격의 거인’은 이사야마 하지메(諫山創)라는 작가의 올해 신작이다. 전작 정보가 거의 없는 것이 등단 작품이 아닐까 싶다. 미래로 추정되는 시대. 거인과 인류의 혈투. 줄거리 요약하기, 참∼ 쉽다.

근데 이 만화, 그리 단순치가 않다. 겨우 3권 나왔는데. 딱 봐도 곧 끝날 낌새가 아니다. 일단 거인들 자체가 미스터리다. 사람과 닮았지만 덩치는 빌딩만 하다. 굶주리지도 않으면서 ‘인간만’ 씹어 잡수신다. 불사(不死) 수준이라 머리통이 날아가도 복구된다. 그 앞에서 인류는 나약하기 짝이 없다. 높은 성벽을 세운 채 숨어 살기 급급하다.

하지만 벽이 견고해진 순간, 인간은 느슨해진다. 안에 있으면 사는 덴 지장 없으니까. 바깥세상이 넓다지만 안 보면 그만. 점점 거인을 감시하는 비용도 아까워진다. 새장이면 어때. 그 안주가 일상이 될 무렵. 초대형 거인이 벽을 뚫는다. 또다시 학살이 시작된다.

‘진격의 거인’이 주는 메시지는 명료하다. 세상은 평화롭지 않다. 안빈낙도를 꿈꾸기엔 잔인함이 넘쳐흐른다. 강한 자는 군림한다. 약한 자는 굴복한다. 난 아니라고 믿고 싶겠지. 허나 자만은 금물. 우주는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

“(갑자기) 지옥이 된 게 아니야. 지금까지 착각하고 있었을 뿐이야. 처음부터 이 세계는, 지옥이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는, 친절할 정도로 이해하기 쉬운 세계….”

맞다. 만화는 무섭도록 현실과 닮았다. 승자에겐 굽실대며, 패자에겐 냉혹하다. 세계 250여 개국 가운데 겨우 62개 나라가 전체 GDP의 98%를 차지한 지구란 땅덩어리. 거인의 표정이 낯설지 않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선거유세장에서 본 듯한 ‘온화한’ 미소. 그 웃음을 머금은 채 사람을 집어 삼킨다.

하지만 그게 인간의 전부일까. 진흙탕에도 연꽃은 핀다. 묵시록 가득한 전장이지만 실낱같은 믿음. 거인 앞에서 울부짖는 동료에게 주인공은 나지막이 읊조린다.

“못하면 죽을 뿐이야. 하지만… 이기면 살아. 싸우지 않으면, 이길 수 없어.”

삶은 보장이 없다. 예정(豫定)은 있어도 기정(旣定)은 없다. 물론 거인은, 세상은 높고 험난하다. 겁이 나고 다리도 떨린다. 그렇다고 그저 당하고만 살 건가. 무서운 건 거인이 아니다. 쌓아놓고 숨기만 했던 마음의 ‘벽’. 그걸 부수지 않고선 무엇도 할 수 없다. 약자여도, 두려워도, 등을 보이지 말자. 진짜 진격은, 그 한 걸음에 달려 있다.

“We deserve it.(우리는 그럴 자격이 있다.)”

P.S. 며칠 뒤, 우연히 후배와 지나친 광화문 거대 조형물 ‘해머링 맨’. 순간 또 허세의 진격.
“근데 이 동상, 진격의 거인 같지 않냐?”
“그러게. 근데 거인은 망치가 없잖아.”
헐, 나만 몰랐던 거냐. 삶은, 어째 매번 ‘그 모냥’이다.

ray@donga.com

레이 동아일보 소속. 첨에 ‘그냥 기자’라 썼다 O2팀에 성의없다 혼구멍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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