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은둔의 땅’ 불가리아 3色매력

동아일보 입력 2010-09-03 03:00수정 2010-09-03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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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 휴식의 바다, 흑해의 여유
綠 생생한 역사와 문화 산책
紅 가슴엔 붉은 정열 한아름
흑해 연안의 ‘고대 도시’ 네세바르의 거리 시장. 고대의 유물을 본떠 만든 기념품이 많다.
○ 綠/푸른 숲 사이로 멈춰선 시간

“조금 답답하기도 하고, 느리기도 하고, 때로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네요.”

동행한 방광식 자유투어 대표가 푸른 숲 사이에서 피어나는 새벽 안개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불가리아 중부 도시 벨리코투르노보는 12세기부터 14세기까지 불가리아 왕국의 수도였다. 얀트라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가장자리로 자리 잡은 집들이 그림같다. 언덕 위로는 중세 성곽인 ‘차라베츠 요새’가 여전히 늠름하게 버티고 있다. 성곽 위 ‘성모마리아 승천 교회’가 조화로운 풍경에 방점을 찍는다.

푸른 숲 속으로 시간이 멈춘 곳. 불가리아에는 자연과 문화유적이 함께 어우러진 곳이 많다. 불가리아는 유럽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 가운데 하나다. 선사시대의 유물과 유적부터 그리스, 로마시대의 유적, 중세 유럽의 유적까지 시대적, 문화적으로도 분포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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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세바르의 골목길
서울 인구보다 적은 인구(약 800만 명)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어 현대화에 따른 유적 손상이 적고 자연 보전도 비교적 잘 돼 있는 편이다. 불가리아 정부가 ‘문화 관광’과 ‘자연 관광’을 모토로 내세우는 것도 이 때문이다.

벨리코투르노보가 숲과 어우러진 유적을 볼 수 있는 곳이라면 흑해 연안의 네세바르는 바다와 공존하는 고대 문명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흑해의 진주’로도 불리는 네세바르는 3000여 년 전 트라키아인들이 정착하면서 건설한 고대 도시다. 로마와 그리스가 번갈아 지배해 유적이 많다. 고대 유적들 사이로 중세의 건축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묘한 분위기를 주는 도시다. 도시 전체가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중남부 도시 플로브디프도 로마 시대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기원 전 지어진 로마 시대의 원형 극장은 아직도 야외 오페라 극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발칸 반도의 유서(由緖)를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수도 소피아를 빼놓을 수 없다. 소피아는 그리스 정교와 러시아 정교, 유대 사원 등 다양한 종교의 사원과 교회가 있다. 이 가운데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건축된 소피아 알렉산더 네브스키 성당은 발칸반도에서 가장 큰 성당이다. 네오 비잔틴 양식의 웅장함과 황금빛 지붕의 화려함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이처럼 불가리아에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것은 관광객에게는 즐거움이지만, 사실 이는 불가리아의 슬픈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랜 기간 외부 세력의 영향력 안에 있었다는 증거다. 소피아에서 만난 불가리아 관광업협회 돈카 소콜로바 회장은 “불가리아의 음악이 슬픈 것은 불가리아의 순탄치 않은 역사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아리랑의 선율이 스쳐 지나갔다.

○ 紅/붉은 열정, 붉은 향기의 고향

네세바르 ‘전능자 그리스도 교회’
불가리아 중부 도시 가브로보는 ‘꼬리가 없는 고양이’로 알려진 도시다. 옛날부터 구두쇠로 유명한 가브로보 사람들이 고양이의 꼬리를 잘랐다는 농담에서 유래한 이 도시의 상징이다. 겨울에 집 안을 드나드는 고양이가 빨리 들어올 수 있도록 꼬리를 잘랐다는 설명이다. 문을 오래 열어두면 집 안의 온기를 빼앗기기 때문이다.

가브로보는 유럽 전역에서 ‘자린고비의 고장’으로 유명한 도시다. 재미있는 것은 가브로보 사람들 스스로도 그들을 풍자하는 이런 농담을 즐긴다는 것. 오히려 그들 스스로가 ‘짠돌이’인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이 불가리아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불가리아가 스코틀랜드와 함께 유럽의 대표적인 구두쇠 고장으로 불리는 것도 이런 가브로보의 ‘명성’ 덕분이다.

하지만 이런 불가리아 사람들이 아끼지 않는 것도 있다. 바로 장미다. 불가리아에서는 장미 기름을 만드는데 재료를 아끼지 않는다. 화장품과 향수의 원료로 쓰이는 장미 기름은 그 진한 향기만큼 값도 비싸다. 같은 양의 장미 기름은 늘 순금보다 비싼 값에 거래된다는 것이 현지 가이드의 설명이다. 장미 기름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장미꽃잎을 모아 끓이고 증류하는 특수한 과정을 거치는데 장미 기름 1g을 짜내는 데는 무려 3000송이의 장미가 들어간다.

가브로보에서 발칸 산맥을 넘어 불과 48km 남쪽으로 내려가면 장미 계곡으로 더 잘 알려진 카잔루크가 나온다. 길이 100km, 폭 20km의 광활한 지역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5∼6월이면 이 계곡이 모두 장미로 뒤덮인다. 구두쇠의 고장 바로 이웃 마을이 풍요로운 장미의 고장이라는 것은 아이러니다. 장미꽃을 채화하는 초여름이면 이 지역은 장미 축제로 들썩인다.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몰려든다.

불가리아의 장미 기름은 생산량이 많을 뿐 아니라 품질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유럽에서 생산되는 장미 기름의 절반 이상이 불가리아에서 나온다. 이 장미 기름의 비밀은 장미 계곡의 기후에 있다. 일조량이 많은 데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어서 일교차와 연교차가 크다. 꽃에게는 그만큼 ‘스트레스’인 셈인데, 장미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수록 풍부하고 질 좋은 기름을 생산하게 된다.

플로브디프 거리에서 만난 예술가의 조각작품.
인내를 통해 향기를 축적하는 불가리아의 장미는 불가리아 사람들의 기질과도 닮았다. 올해 74세인 이상종 박사는 1950년대 말 북한에서 불가리아로 유학을 왔다가 이 나라로 망명한 거의 ‘첫’ 불가리아 교민이다. 1990년 한국과 불가리아가 수교하면서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현지에서 만난 이 박사는 “불가리아 사람들은 마음은 따뜻한데 겉으로는 표현을 하지 않는 민족”이라며 “웃음을 가슴 속에 감추고 있는 민족”이라고 한마디로 정의했다. 외세의 잦은 침략과 오랜 지배를 받아온 탓에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 삭인다는 뜻이다.

카잔루크의 장미 계곡을 방문한 지난달 25일은 이미 채화가 끝난 계절이어서 장미꽃밭의 장관을 직접 볼 기회가 없었다. 불가리아 장미 기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장미 박물관을 방문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장미계곡의 평원을 따라 소피아를 향해 서쪽으로 달리는 동안 장미의 열정만큼이나 황홀한 석양을 볼 수 있었다. 지평선 위로 찬찬히 떨어지는 낙조는 장미꽃 대신 방문객의 마음을 달래준 불가리아의 선물이었다.

글·사진 소피아·벨리코투르노보·포모리에·카잔라크·플로브디프·네세바르=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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