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소설과 영상문법 사이에서 길 잃은 연극

  • 입력 2009년 10월 8일 0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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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창제의 원리를 추리극으로 푼 소설 ‘뿌리 깊은 나무’를 연극 무대로 옮긴 ‘누가 왕의 학사를 죽였나’. 사진 제공 플래너 코리아
한글 창제의 원리를 추리극으로 푼 소설 ‘뿌리 깊은 나무’를 연극 무대로 옮긴 ‘누가 왕의 학사를 죽였나’. 사진 제공 플래너 코리아
누가 왕의 학사를 죽였나

소설은 희곡에 비해 독자의 충성도와 집중력이 높다. 작가의 해설이 다양한 방식으로 개입할 수 있다. 복잡한 설명을 접하면 책을 덮었다가 다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연극 관객에게 이를 요구하긴 힘들다. 연극은 대사 중심으로 진행된다. 설명이 필요해도 극중 대사에 녹여내야 하고, 게다가 즉석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관객의 직관에 호소해야 한다. 그래서 소설이 문어(文語)적이라면 연극은 구어(口語)적이다.

연극 ‘누가 왕의 학사를 죽였나’(박승걸 작, 연출)는 문어적 소설문법과 구어적인 연극문법의 차이를 뚜렷이 보여준다. 한글 창제의 원리를 추리극 형식으로 푼 이 작품은 이정명 씨의 소설 ‘뿌리 깊은 나무’를 연극화했다. 훈민정음 반포 7일 전 궁궐에서 집현전 학사들의 연쇄 피살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추적하는 궁궐수비대 하급 관원(겸사복) 강채윤의 수사 과정을 통해 한글 창제에 숨겨진 비밀이 드러난다는 내용이다.

작품 속에서 한문의 세계관에 맞서 구어로서 한글의 자주적 세계관을 발견하는 과정은 문어-구어의 상반된 본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소설을 연극화한 이 작품의 형식미학과도 의미심장한 상관관계를 나타낸다.

그러나 실제 공연을 보면 소설, 그것도 역사와 추리가 겹쳐진 소설의 연극화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절감하게 된다. 500여 년 전 궁중의 제도와 언어를 설명하고, 연쇄살인의 추리를 당대 법의학 지식에 녹여내고, 한글 창제의 심오한 원리를 일목요연하게 풀어내야 한다.

이런 도전에 대한 이 작품의 연극적 응전은 관객의 눈에만 보이는 해설자인 광대(유나령)를 주인공 강채윤(김완)에게 붙여주는 것이다. 광대는 조선과 현대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무성영화의 변사 역할과 셜록 홈스의 조력자 왓슨 박사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런 연극적 장치는 분명 영화나 드라마에선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요소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런 연극적 장치의 묘미를 십분 살리지 못하고 사건 중심의 활극을 강조하는 영상문법에 포획되고 말았다. 극중 인물과 상호작용을 못하는 광대가 극중 개입을 반복하다 보니 다른 등장인물의 생동감과 극의 입체성을 떨어뜨렸다. 이런 계몽극적 구도는 한글 창제 원리의 비밀을 간직한 언어장애 궁녀 소이(황순미)와 강채윤의 사랑마저 상투화시켜 버렸다. 세종(유상재)을 직접 칼을 들고 암살자들과 맞서 싸우는 능동적 인물로 그렸다고 하지만 이 역시 TV 드라마 ‘이산’ 속 정조의 동어반복적 표현일 뿐이다. 이 작품이 지닌 내용과 형식에 대한 투철한 고민을 바탕으로 연극적 문법에 더 충실한 새로운 작품을 기대해본다. 1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02-3272-2334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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