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의 문화프롬나드] 느긋함의 미학·유연함의 로망

  • 입력 2009년 9월 21일 18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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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가 가벼웠던 학창시절, ‘전집’은 로망이었다. ‘누구누구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은 돈 많은 사람들의 호사로만 알았다. 실제로 10대에 음반 전집이란 것을 손에 넣어본 적이 없었다. LP가 가득 담긴 하드케이스는 언제나 단단한 벽처럼 느껴졌다.

전집이란 것을 처음으로 내 방에 들여놓은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사연이 있어 강매 당하다시피 사게 된 100장짜리 클래식 세트였다. 초심자들을 위한 가이드북 수준의 세트로, 얇디얇은 당시의 귀로도 썩 내키지 않은 ‘선물’이었다. 수크 트리오의 베토벤 3중주는 꽤 괜찮았지만.

브람스의 교향곡 4곡이 담긴 CD 전집이 배달되어 왔다. 사이먼 래틀 경이 베를린필과 연주한 2008년 실황반이다. 겉보기엔 한 장짜리 CD와 별 차이가 없어 LP 시절의 두툼한 손맛이 아쉽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랴 싶다. 전집은 직장인이 되어서도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귀물’이다. 결국 전집을 산다는 것은 ‘지갑’의 문제가 아닌 ‘의지’의 영역이 아닌가 싶다.

1번 첫 머리의 당당한 팀파니 소리가 귀에서 이어폰을 타고 가슴으로 자르르 번진 뒤 끝내 심장을 친다. 지금까지 들어 온 브람스와는 사뭇 다르다. 래틀 특유의 낙관적 느긋함이 흐른다.

브람스를 들어 보면 ‘이것이 브람스다!’라고 시종일관 귀에다 질러대는 지휘자들이 적지 않은데 래틀은 ‘이런 브람스도 괜찮지 않소?’하고 미소로 묻는 듯하다. 칼로 잘라줘야 할 때조차 슬쩍 한 템포 끌어 완만하게 다듬고 지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겁다’라든지 ‘답답하다’라는 느낌이 들지 않은 것은 래틀 경의 솜씨 덕일 것이다.

베를린필의 두툼한 연주도 래틀의 ‘느긋함’에 정확히 부응한다. 듣고 있으면 어쩐지 스테이크가 먹고 싶어지는 연주다. 살짝 손가락으로 눌러주면 육즙이 스윽 배어나오는 듯 푸짐한 소리가 귀에 앞서 위장을 건드린다.

하도 느긋하다 보니 때로 뛰어나가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래틀의 지휘봉은 ‘어차피 한 인생, 뭐 그리 서두를 것 있소’하는 듯하다. ‘하긴 그야 그렇지’하며 눌러 앉게 만드는 연주다. 신기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래틀이 시종일관 ‘느림의 미학’만을 주장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느린 듯 하면서도 할 말 다 하는 충청도 사람같다. 클렘페러처럼 무겁지도 않고, 푸르트벵글러와 같이 과도하게(?) 템포를 쥐었다 폈다 하지도 않는다.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의 사운드를 능가했다’라던 당시의 호평에 과장이 있다 해도,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의 사운드와는 확실히 다르다’에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래틀 경은 “이상적인 브람스라면 중량감과 유연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유자재의 프레이징이 가능하며, 블록버스터 같은 효과뿐만 아니라 그 범상치 않은 사운드의 레이어를 표현할 수 있다”라고 자신만의 해석을 내놓았다고 한다.

적어도 그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다. 확실히 4곡의 브람스 교향곡에는 그가 말한 ‘중량감’과 ‘유연함’이 가득하다. 그것도 우직할 정도로 시종일관.

그런데 사실은 그의 다른 말이 더 재미있다.

“지휘자로서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브람스는 언제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연주하는 브람스였다. 매우 ‘끔찍한’ 일이지만 여전히 그러하다.”

CD를 듣는 내내 그가 말한 ‘누군가’를 생각했다. 래틀 경이 떠올린 ‘이상적인 브람스’는 누구였을까.

이 음반은 두 가지의 첫 경험을 안겨 주었다. 단 한 번도 쉼 없이 브람스의 교향곡 4곡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것은 기적이다!). 그리고 듣고 난 뒤에는 ‘그럼 슬슬 시작해볼까’하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

느긋한 휴식 뒤의 산뜻한 출발은 삶의 선물이다.

‘이상적인 브람스’란 바로 이런 연주일 것이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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