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문서 연락… 갖은 옥고… 광복위해 싸운 간호사 34명

  • 입력 2009년 8월 13일 02시 59분


■ 中동포 김려화씨 자료 발굴

신채호 부인 박자혜선생 포함
독립운동 생생한 활약상 담아

영원히 묻힐 뻔한 여성 간호사 34명의 독립운동 활동이 중국 동포의 노력으로 공개됐다. 간호사들의 독립운동 행적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은 처음이다.

2007년 한국에 건너와 이화여대 간호과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중국 동포 김려화 씨(27·여)는 2년 동안 발굴한 간호사들의 독립운동 활동자료를 정리해 최근 논문집으로 발간했다. 김 씨는 간호사들의 독립운동을 △비밀문서 연락 및 군사정보 정탐(박자혜 임수명 박원경 박혜경 탁명숙 등) △지역사회·병원을 중심으로 만세운동(한신광 김효순 이성숙 이도신 등) △적십자운동(김오선 김태복 박옥신 윤진수 이정숙 체계복 등) △보건교육 및 계몽운동(박인덕 정종명 등)으로 나눴다.

특히 ‘단재 신채호 선생의 부인’으로만 부각됐던 박자혜 선생이 간호사 신분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실을 처음으로 상세히 밝혔다. 조산부양성소를 졸업한 후 1916년부터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한 박 선생은 3·1운동으로 각 병원에 부상자들이 줄을 잇자 동료 간호사들을 독려해 ‘간우회’를 조직했다. 또 간호사들의 동맹파업과 만세운동도 주도했다. 1919년 더는 일본인들만을 위한 병원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며 베이징 연경대학(현 베이징대)으로 유학 간 그는 이듬해 신채호 선생을 만나 결혼한 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정종명 선생은 비밀리에 독립운동 서류를 전달하다 옥고를 치렀다. 17세에 결혼한 그는 2년 만에 남편이 사망하자 생계를 위해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소에 들어갔다. 그는 1919년 약제실 직원을 가장해 근무 중이던 독립운동가 이갑성 선생으로부터 3·1운동 관련 서류를 받아 몰래 전달하려다 발각돼 문초를 당했다. 이 일을 계기로 병원을 그만두고 산파로 일하게 된 그는 독립운동가가 검거됐다는 소식만 들리면 감옥에 돈과 옷 음식 등을 들여보냈다. 돈이 없으면 집에 있는 물건을 전당포에 맡기기도 했던 그는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누이이자 어머니 같은 사람’으로 불렸다.

한신광 선생은 3·1운동과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행동파’였다. 고등학생이었던 17세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경남 진주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다 2개월간 투옥됐다. 1923년 동대문부인병원 간호부양성소를 졸업한 한 선생은 ‘간호사들이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한다’며 조선간호부협회를 설립했다. 이후 임산부와 아동건강을 위한 강연에 전념하던 그는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때 서울에서 학생들을 모아 운동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1년 동안 징역형을 살았다.

김 씨가 간호사들의 독립운동을 발굴해 정리하게 된 것은 독립운동가였던 증조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그는 “부모님으로부터 증조할아버지의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며 “민족적 끈이 없었더라면 도중에 포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으로 유학 온 그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간호사는 없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자료 수집에 나섰다. ‘독립운동사 자료집’에 기록된 작은 단서들을 기반으로 경성지방법원 판결문과 고등경찰의 수사기록 등을 뒤졌다. 그는 “형무소 기록으로 남아 있는 자료 중에는 직업란에 뚜렷하게 ‘간호부’로 적혀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 씨는 “간호사가 주도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리게 돼 기쁘다”며 “앞으로도 문헌 발굴을 계속해 공개되지 않았던 사실들을 자세히 밝히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김 씨의 연구결과에 힘입어 대한간호협회는 지난달 15일 처음으로 200여 명의 간호 관계자가 참여한 가운데 박자혜 선생 추모행사를 열었다.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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