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못믿을 가족…“한국사회 꼬집기”

  • 입력 2009년 1월 15일 03시 01분


연극 ‘너무 놀라지 마라’. 영화 촬영 중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뒤늦게 도착한 장남(김영필)이 화장실에서 목을 맨 아버지(이규환)의 시신 앞에서 촬영부터 끝내고 장례를 치르겠다며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사진 제공 극단 골목길
연극 ‘너무 놀라지 마라’. 영화 촬영 중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뒤늦게 도착한 장남(김영필)이 화장실에서 목을 맨 아버지(이규환)의 시신 앞에서 촬영부터 끝내고 장례를 치르겠다며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사진 제공 극단 골목길
예술가인 체하는 아들… 바람난 마누라-며느리…

박근형 作 ‘너무 놀라지 마라’

자살한 아버지 관점서 보니…

《산울림소극장의 ‘연극연출가 대행진’ 네 번째 작품으로 공연 중인 박근형 연출의 ‘너무 놀라지 마라’는 비루한 일상을 외면한 채 명분과 도덕에 집착하는 한국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한 블랙코미디다.

작품 초반에 등장해 화장실에서 목을 매 자살한 뒤 공연 내내 대롱대롱 매달린 채 관객에게 끊임없는 웃음과 불편을 유발하는 아버지(이규환)의 관점에서 이 작품의 내용과 의미를 새롭게 풀어본다.》

○ 아버지 시신을 버려두고 자기 환멸에 빠진 자식들

나는 썩는 내를 풍기며 과메기 아니 쥐포처럼 말라 비틀어져간다. 환풍기마저 고장 난 변기 옆에서 목을 매단 채.

지독한 변비로 고생하는 백수 둘째 아들(김주완)은 변기를 붙잡고 용을 쓰면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나를 애써 외면한다. 세상이 무서워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는 못난 놈답게 “원래 이런 일 뒤처리는 장남이 하는 거잖아요”라며. 영화감독인 첫째 대신 노래방 도우미로 집안 생계를 책임진 며느리(장영남)는 “아버님 왜 그러셨어요”라며 내 바짓가랑이 잡고 통곡 한 번 쏟아내더니 변소 문 쾅 닫고 태연한 얼굴로 출근한다. 악취를 호소하는 둘째의 불평에 “형이 이 집 가장인데 아버님 가시는 얼굴은 보여드려야지. 안 그러면 우리, 아버님 형님 두 분한테 평생 죄 짓고 사는 거야”라며.

그래서 애타게 기다렸지. 우리 집 장남(김영필)이 돌아오길. 모처럼 영화 촬영 일로 바쁘다며 한 달 넘게 집 비운 녀석이 남의 집 문상 가듯 국화꽃 들고 나타나서는 둘째에게 하는 말 좀 들어보소. “소식 듣고 많이 울었다. 이보다 더한 비극이 어느 가문에 있을까. 아, 가슴 아프다”였다. 만화만도 못한 SF영화 찍으면서 대단한 예술가인 양 유세를 떨던 녀석. “왜 우리 아버진 가시밭길 역경 때마다 이렇게 얼굴색이 좋아지실까? 야, 이건 놀라운 캐릭터다. 죽음 앞에서 오히려 자애로운 인간의 모습. 어쨌든 다행이다. 이렇게 밝게 가시니”라며 먹칠된 가문의 명예에 분칠하기 바쁘다. 그 녀석마저 “감독은 이런 자잘한 일 하는 거 아니야. 나 없으면 현장 안 돌아가”라며 썩어가는 날 버려두고 떠난다.

내사 이럴 줄 몰랐다. 그냥 쿨 하게 가자고 목욕재계하고 손톱 발톱 다 깎고 양복차림으로 목을 맸는데. 어느 자식새끼 하나 날 편히 눕혀주는 놈 없구나. “너무 놀라지 마라”라는 유언 남기고 세상 떠난 친구 놈 문상 갔다가 5년 전 집 나간 마누라가 소복 입고 상주 곁에 서서 나랑 맞절하는 ‘개뼈다귀 같은 시추에이션’이 싫어 그냥 말없이 가려 했는데. 저승길 문턱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더 악몽 같구나.

매일 새벽 분 냄새 술 냄새 풍기며 들어와 술주정 늘어놓던 며느리는 끝내 시아버지 시체가 매달려 있는 집으로 남자를 불러들이면서 “너무 놀라지 마. 당신들 집안이라고 뭐가 달라”라고 냉소한다. 아내와 형수가 웃음을 팔든 몸을 팔든 돈만 벌어오면 만사무심하던 두 아들은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그녀의 거짓말에 세상이 무너진 듯한 배신감으로 치를 떤다.

○ 놀랍다고? 이게 어디 남 이야기던가

그런데 뭘까. 이 요상한 분위기는. 변소에 대롱대롱 매달려 썩어가는 나를 문상하는 저 관객들은 왜 저렇게 웃어댈까.

첫째의 모습에서 거창한 말만 떠들지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기 바쁜 386세대의 초상을 발견한 겐가. 배설의 쾌락을 누리지 못하는 ‘불변(不便)세대’로 그려진 둘째의 모습에선 사회에 대한 불만을 생산적 문화로 연결하지 못하는 88만 원 세대를 발견한 겐가. 그럼 며늘애는 뭐지. 겉으론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고 노래를 부르면서 욕망충족을 자아실현으로 둔갑시키는 이 시대 ‘줌마렐라’의 허상이라도 본겨.

뭐 그리 놀라시나. 자식들 과외비다 생활비다 해서 노래방 도우미로 부업전선에 나선 엄마들, 골방에 틀어박혀 ‘악플 달기’에 여념 없는 ‘은둔형 외톨이’들, 예술 합네 하며 정작 비루한 현실을 외면한 채 백일몽만 꾸는 키덜트들, 그리고 꼰대라 손가락질 받으며 천덕꾸러기로 늙어가는 가장들이 어디 남 이야기인가. 제발 지들 잇속 땜시 아비의 송장을 유기하면서 ‘아비의 부재’를 운운하는 그런 위선은 떨지 말자고. 제발 나 좀 내려줘, 첫째야∼, 둘째야∼, 며늘애야∼ 잉.

매주 화요일과 설날을 제외하고 2월 1일까지 산울림소극장. 02-334-5915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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