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9>

  • 입력 2009년 1월 15일 03시 01분


호모 에렉투스, 호모 루덴스, 호모 파베르, 호모 폴리티쿠스, 호모 날리지언, 호모 모벤스, 호모 텔레포니쿠스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

인간의 정의(定義)가 다양한 만큼 로봇을 바라보는 틀 역시 변화를 거듭했다. 안드로이드들은 ‘로보 사피엔스’, 지혜로운 로봇을 가장 선호했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기 때문이다.

축하쇼 단독 진행을 맡은 이는 로봇MC 남이다.

이 안드로이드는 40여 년 전 큰 인기를 끌다가 돌연 낙향하여 레저사업가로 변신한 개그맨 남희석의 흉내를 기막히게 냈다. 눈가의 주름과 재치 있는 말투, 사람 좋은 웃음까지 똑같았다.

<로봇들의 수다>를 진행하는 로봇MC 남이 바로 사이보그 남희석이라는 풍문이 돌았다. 젊음을 되찾기 위하여 거금을 쏟아 부어 팔다리와 가슴 그리고 얼굴 일부를 기계로 대체한 후 로봇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로봇MC 남이 구사하는 언어가 인공언어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전문가 지적도 따랐다. 남희석이 2047년 겨울부터 무창포 별장에서 종적을 감추었기 때문에 의심은 증폭되었다. 사이보그냐는 질문에 로봇MC 남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 하회탈 웃음만 지어보였다.

로봇MC 남이 피루에트(pirouette, 한쪽 다리를 축으로 회전하는 발레동작) 11회전을 멋지게 마친 다음 양팔을 벌리고 객석을 향해 윙크했다.

“자기야 사랑해! 내 맘 알지?”

박수가 쏟아졌다.

“지금부터 <보노보> 개국 축하쇼를 시작하겠습니다. 로봇전문신문은 <로봇투데이>, <로봇일보>, <로보피아> 등 다섯 종류나 선을 보였지만 로봇전문채널은 처음입니다. 오늘 축하무대는 로봇만으로 꽉꽉 채워집니다. 하도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만, 1969년 달에 내린 닐 암스트롱이 그랬다면서요. ‘개인에게는 작은 한 걸음에 불과하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이다’라고요. 멋진 말입니다. 오늘은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 ‘로보 사피엔스’가 첫 걸음을 떼는 날입니다.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작은 방송국이 하나 더 생기는 데 불과하지만 로보 사피엔스에게는 거대한 도약이다!’ 이겁니다. 뭐가 로보 사피엔스냐고요? 직접 보고도 못 믿으십니까? 눈앞에 잘 생긴 로보 사피엔스가 있지 않습니까? 질문 사절입니다. 작지만 중요한 걸음을 내디디려는데, 자꾸 시간이 지체되네요. 시작하겠습니다.”

로보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춰 무대 꼭대기에서 쇠공이 쏟아졌다.

떨어질 때는 공이었지만 되튈 때는 개와 고양이와 닭과 소와 말과 쥐와 기린과 코끼리와 낙타와 사슴과 토끼와 거위와 하마와 늑대와 원숭이로 바뀌었다. 그리고 각자의 방식대로 짖기 시작했다. 소음이 뒤섞였다. 이 소리가 저 소리를 먹고 저 소리가 그 소리를 삼키면서 거대한 울림으로 소용돌이쳤다. 짐승 로봇들은 무대를 빙글빙글 돌며 <축배의 노래>를 합창했다. 그것은 인간의 목소리였다. 인간의 목소리와 구별하기 힘든 기계음이었다.

뒤이어 양 갈래 머리를 땋은 소녀 로봇이 진흙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나왔다. 진흙을 움큼움큼 집어 던졌다. 크고 작은 진흙 덩이가 무대에 깔렸다. 꿈틀꿈틀 보글보글 끓던 덩이에서 개구리 로봇이 폴짝 폴폴짝 튀어나왔다. 가까운 놈들끼리 점프해서 이마를 부딪쳤다. 상대를 부수고 삼킨 개구리 로봇은 점점 자라 도마뱀 로봇으로 탈바꿈했다. 도마뱀 로봇끼리의 대결에서 이긴 놈은 악어 로봇이 되고, 악어 로봇끼리 큰 입을 쩍쩍 벌리면서 뒤엉킨 끝에 승리한 두 놈은 각각 티라노사우루스 로봇과 알로사우루스 로봇이 되었다.

두 육식공룡 로봇이 앞발을 들고 맞붙는 순간, 바구니를 쥐고 다시 무대에 오른 소녀 로봇이 진흙 덩이 대신 꽃가루를 흩뿌렸다. 허공에서 뭉친 꽃가루가 두 로봇의 쫙 벌린 거대한 입으로 벌떼처럼 후루룩 들어갔다. 폭죽 소리와 함께 공룡 로봇들이 동시에 폭발했다. 원뿔 모양 천장에서 꽃들이 송이송이 함박눈처럼 내렸다. 매혹적인 꽃향기가 객석을 휘감았다.

“상상하라 현실이 될지니!”

로봇MC 남이 과장된 손짓으로 꽃송이를 집어 온몸에 꽂았다. 빛깔과 모양과 향기가 노란 개나리, 붉은 채송화, 흰 백합으로 시시각각 달라졌다. 나노스케일의 변형이 가능한 초전자폴리머 54로 만든 꽃은 3천 모양, 2천 향기, 1천 빛깔로 바뀔 수 있었다.

변화무쌍!

로봇 채널 <보노보>의 화려한 탄생이었다.

● 알립니다

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먼 시계공’은 지면 게재일 전날 오후

2시부터 동아일보 홈페이지(www.dongA.com)에서 미리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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