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항일 투옥도 가족의 배신도 ‘시대 폭력’의 상처

  • 입력 2008년 12월 25일 02시 58분


연극 ‘인간의 시간’

“삶의 부패를 막아주는 죽음의 향기 같은 것, 그런 것이 있어.”(극중 소설가 윤미현의 대사)

이 이야기는 무겁다. 현재와 과거의 사람들 모두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싸워야 한다. 이들은 관념적인 고민이 아니라 육체에 가해지는, 죽음으로 치닫는 폭력에 저항한다.

연극 ‘인간의 시간’(배봉기 작, 김광보 연출)은 한국연극 100년을 기념한 ‘창작희곡 공모전 당선작’을 무대에 올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독립운동가 이원형이 만주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배에서 내린 승객들, 마중 나온 사람들로 가득한 항구는 곧 2001년 겨울 오가는 사람들로 가득한 서울 거리로 바뀐다. 행인 속에서 젊은 사내가 두 남자에게 붙잡힌다. 사내는 정신병원으로 끌려간다.

작품은 과거 이원형의 이야기와 현재 시점에서 이원형의 평전을 쓰는 미현의 이야기를 교차해 전개한다. 재산문제로 형제들에 의해 억울하게 정신병원에 갇혔던 애인 광석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미현의 마음은 늘 고달프다.

얼핏 이원형의 국가에 대한 고뇌와 광석의 개인적인 고통은 큰 간극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상관없어 보이는 두 이야기에서 작가가 찾아내는 공통된 문제의식은 ‘시대가 가하는 폭력’이다. 작품은 이원형과 정광석의 분투를 통해 주권을 빼앗은 폭압의 시대와 금전에 휘둘리는 물신의 시대에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인간의 시간을 살아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관객이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 접점을 찾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지만, 그렇게 찾은 주제는 오랜 여운을 남긴다. 이호재 박웅 추귀정 장미자 이남희 길해연 김내하 씨 등 실력파 배우들이 극을 탄탄하게 지탱한다.

아쉬운 점은 구국을 위해, 또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캐릭터들이 내적인 갈등 없이 신념을 이어가는 것으로 그려져 때로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서울 종로구 동숭동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27일까지. 1만 원. 02-744-7063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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