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상반기 최악의 연기자들

  • 입력 2008년 6월 10일 03시 00분


《가끔 나 스스로를 반성한다. ‘혹시 나는 홍길동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처럼, 혹시 나는 최악의 연기를 보고도 “최악의 연기다”라고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오늘은 최근 본 영화들 중 최악의 연기들을 손꼽아 봤다.》

상대가 대사할때 몸 둘 바 몰라해

원수지간으로 이혼한 진아(김태희)와 상민(설경구)이 그 후로도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싸운다는 줄거리. 사랑스러운 김태희. 그가 일부 선배 연기자처럼 CF라는 유리벽 속에서 안온하게 사는 ‘유리공주’가 되지 않으려면, 전작인 ‘중천’에 이어 이 영화에서도 드러난 연기상의 약점을 극복했으면 한다.

첫째, 감정의 미묘한 온도 차가 표정과 목소리로 배어 나와야 한다. 그러나 김태희는 특히 울거나 화내는 연기에서 거의 똑같다. “헤어질 거면 죽자. 그러자, 우리” 하면서 포옹할 때는 감동의 울음이고, “이 꼴을 보이라고? 그렇게 열심히 일한 사람들한테?” 하고 절규할 때는 체념과 분노의 울음이어야 한다. 하지만 기복 차가 없는 그의 표정과 음성은 모두 필요 이상 과장되어 있다. “아, 그 예민결벽과다집착형 새가슴증후군?” 하고 전남편을 비꼴 때는 마치 대사를 또박또박 읽는 듯. 새침하고 참하고 귀여운 모범생 이미지에서 벗어나, 더 과감하고 굴곡진 인생 경험이 그에게 필요한 건 아닐까.

둘째, 상대가 대사를 하는 순간에도 집중력 있게 연기해야 한다. 김태희는 상대 배우가 대사를 하는 순간이면 표정관리를 못해 몸 둘 바를 몰라 한다. 배우의 표정은 상대 배우의 대사를 듣는 순간에도 살아 움직여야 한다. ‘자아’의 굴레를 박차고 나와 상대 배우에게 자신을 던져버리면 어떨까.

비장한 장면서도 목석같은 얼짱

세계 각지를 돌며 2년여에 걸쳐 진행한 오디션 끝에 ‘캐스피언 왕자’ 역으로 캐스팅된 영국 배우 벤 반스. 인기 그룹 SS501의 김현중과 닮은 그는 완벽한 얼굴을 자랑하지만, 연기는 악몽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관객의 복장이 터질 만큼 목석같은, 근거를 찾기 힘든 그의 침착한 표정. 전투를 앞두고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순간이나, 곤경에 빠진 동료를 구하기 위해 황급히 사지로 달려가는 순간이나, 심지어는 “(자신을 배신한 삼촌에게 칼끝을 들이대면서 비장한 마음으로) 살아 있어라. 내가 나니아 왕국을 구할 때까지…” 하고 멋진 대사를 날릴 때마저도 그는 한결같이 별일 아니라는 표정이다.

표독하고 섹시하면서도 우수 내비쳐야

손예진은 얼굴도 예쁘고, 머릿결도 최상이고, 발도 예쁘고, 연기도 되는 몇 안 되는 여배우 중 하나. 그런데 ‘무방비도시’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그는 자신을 소매치기 조직의 두목으로 인식시키는 데 실패했다.

이유는, 너무 많은 욕심을 부렸기 때문. 청순하면서도 영리하고 새침한 이미지를 쌓아 온 손예진은 이 영화를 통해 이미지의 지평을 넓히려 했다. 표독하고, 싹수 없고, 섹시하고, 내숭 떨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순수와 우수(憂愁)가 살짝 우러나는 복합적인 캐릭터. 하지만 “사내새끼들은 정말 피곤하다니까” 하고 내뱉는 대사는 입에 착 달라붙지 않았다.

손예진의 연기가 설득력을 얻지 못한 이유는 세 가지. 첫째는 복합적인 내면을 보여줄 만한 극적 시추에이션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스스로 ‘색다른 연기에 도전하고 있어’ 하고 남을 의식하는 듯한 연기를 했기 때문이며, 셋째는 극중 소매치기 두목 ‘백장미’ 같은 복잡다단한 캐릭터가 지구상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대에 안 맞는 메이크업 우스꽝

최근 개봉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중 최악의 영화. 도저히 기원전 1만 년 전 이야기로 생각할 수 없다. 신석기시대 주인공이 “태양이 뜨면 모두 하나가 되어 싸우자”는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황당무계한 상황은 접어두더라도, 남녀 주인공의 메이크업과 연기는 우스꽝스러울 정도.

사랑하는 여인인 에볼렛(카밀라 벨)이 노예 사냥꾼들에게 붙잡혀 가자, 애인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청년 들레이(스티븐 스트레이트)의 모험담. 들레이 역의 남자 배우는 뉴욕 월스트리트로 출근하는 펀드 매니저처럼 잘 다듬어진 수염에다 한껏 지적인 표정을 하면서 무슨 매머드를 잡겠다고 창을 던져댄다.

에볼렛 역의 여배우는 설상가상. 최첨단 레게머리에다 아이섀도를 한 것도 모자라, 촌스러운 파란색 서클렌즈를 끼고 나와 ‘파란 눈의 신성한 여성’이라 한다. 치아 미백을 통해 만든 듯한 새하얀 앞니를 드러내면서 애인과 키스를 나누는 라스트 신은 ‘섹스 앤 더 시티’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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